3. 4년 전 첫 주말 밥상 - 뭇국
3. 4년 전 첫 주말 밥상 - 뭇국
내가 맨 처음 손수 밥상을 차렸을 때는 4년 전이었다. 그때 시도한 메뉴는 뭇국과 닭다리 간장조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먹어본 음식이기도 했고 식구들이 다 좋아해 첫 선택으로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뭇국과 짭조름하면서 달짝지근하고 다릿살을 씹을 때의 식감에 행복해한 닭다리 간장조림은 음식 궁합으로도 잘 어울린다.
#덩치가 크고 무거운 무
무는 밥상 음식의 식재료 중에서 덩치가 크고 무게도 무겁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집밥을 차리기 시작한 초창기, 동네 마트에서 이것저것 주워 담다 보니 혼자 들고 가기에는 벅차 배달 서비스를 신청하기로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배달 서비스에는 두 개의 조건이 붙었는데 하나는 구매한 물품의 총액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매 물품의 총중량이었다.
밥상 음식의 식재료 중에서 덩치가 크고 무거운 무. 집에 있는 전자저울로 마트에서 산 일반 무 반 개의 무게를 달아봤다. 저울의 숫자는 800g을 가리켰다.
총액 기준은 통과했는데 5kg 이상인 총중량에 모자랐다. 무게를 맞추기 위해 아무거나 살 수는 없었다. 그때 무가 얼른 떠올랐다. 무는 식재료 중 우람한 덩치만큼이나 중량도 많이 나간다. 중간 크기의 무도 1kg을 훌쩍 넘는다. 이 날따라 무란 존재가 고마웠다.
#쓰임새가 무궁무진한 무
식재료인 무의 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생무는 세 가지 맛이 복합적으로 난다. 달고 맵고 쓰다. 씹으면 아삭거리는 소리가 나 청각적으로도 입맛을 유혹한다. 무는 비타민 C와 미네랄, 식이섬유 등 영양소가 풍부하다. 무는 시원한 맛을 대표하는 식재료인데 95%가 수분이라 그렇다. 무로 우려낸 국물은 깔끔하고 더부룩한 속을 편안하게 해 준다. 무거운 무일수록 신선하고 맛도 좋다. 속이 꽉 차고 여물어 무 다운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 잎이 녹색을 띨수록 싱싱하고 수염뿌리가 규칙적으로 늘어진 게 단맛이 강하다. 국물용으로 무가 많이 사용되는 이유다.
무청과 시래깃국
우람한 몸집에 중량이 많이 나가는 무의 잎과 줄기, 즉 무청도 매력적인 식재료다. 무청으로 김치나 물김치를 담그기도 하고 끓는 물에 데쳐 무친 나물무침으로도 인기가 많다. 겨울철 별미인 동치미에도 무청을 떼 내지 않은 무를 통째로 사용하기도 한다. 무청은 바싹 말려도 훌륭한 식재료가 된다. 우리가 다 아는 시래기가 바로 말린 무청이다.
시래기에 된장을 풀고 끓인 국이 시래깃국이다. 배춧국과 함께 시래깃국은 고향의 맛을 떠올리는 정겨운 음식이다. 시래기에는 비타민 B, C, 식이섬유, 칼슘, 철분 따위의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어 건강식으로 손색이 없다. 재활용 채소라 값이 매우 싸고 만지면 바삭거리며 으스러진다. 바삭하게 건조된 상태라 물에 불리면 깜짝 놀랄 정도로 양이 늘어나는 것도 시래기만의 장점이다.
돼지등뼈를 푹 고아 만든 감자탕에 흐드러지게 들어간 채소가 시래기다. 푸짐한 양에 비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저렴한 가격이라 가성비가 탁월하고 몸에도 좋은 고마운 음식이 아닐 수 없다.
무순
참치회를 먹을 때 약방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무순은 무씨가 싹을 틔운 어린 새싹이다. 싹이 금방 튼다고 해서 심심풀이 삼아 무씨를 사 아파트 베란다 창가 화분에 심었더니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키가 6~7cm로 자라 수확해 먹을 수 있었다. 알싸한 맛과 향이 뛰어나고 날것으로 먹는 건강식이다.
매콤하면서 오독오독한 식감이 뛰어난 오그락지.
오그락지
중고등학교 시절 도시락 반찬의 대명사였던 오그락지도 빼놓을 수 없다. 오그락지는 무를 작고 얇게 썰어 말린 무말랭이를 고춧가루, 고춧잎, 볶은 깨 등으로 양념해 버무린 반찬용 무다. 꼬들꼬들하게 생긴 모양이 재미있고 매콤하면서 오독오독한 식감이 중독성이 있어 밥반찬으로 그만이다.
입맛이 없을 때 물에 밥을 말아 오그락지와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무말랭이는 말리는 기술이 중요하다. 잘못 말리면 너무 딱딱해 씹기가 곤란할 수 있어서다. 계절별로는 가을철 무를 으뜸으로 친다. 가을에 수확한 김장 무가 달고 시원한 맛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무조림과 무밥
간장과 매실액, 맛술, 설탕을 넣고 섞은 양념장으로 무를 조린 무조림도 밥반찬으로 손색이 없다. 채 썬 무를 넣고 밥을 안치면 무밥이 되는데 먹어본 적은 없다. 콩나물밥처럼 양념간장에 비벼 먹는다고 한다. 내가 자란 대구에서는 무를 무시라고 불렀다. 어릴 때 생무를 크게 썰어 주전부리로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입맛을 돌게 하는 무생채무침.
무생채무침
백반 상차림에 자주 오르는 무생채무침도 입맛을 돌게 하는 밑반찬이다. 채칼로 일반 무의 껍질을 벗긴 뒤 무채 칼로 채 썰어 양념에 무친 새콤하면서 매콤한 음식이다. 무채에다 고춧가루 2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소금 반 작은술, 식초 2술, 참기름 1술, 참치액젓 1작은술, 볶은 참깨 1술 따위의 양념을 뒤섞어 버무리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무의 양은 일반 무의 4분의 1 크기, 1술은 밥숟가락, 1작은술은 티스푼 기준이다. 싱거울 때는 소금으로, 짤 때는 올리고당이나 설탕으로 간을 조절하면 된다.
설렁탕을 먹을 때 위풍당당한 위엄을 드러내는 깍두기.
깍두기와 무김치
무의 존재감이 깍두기와 무김치에 이르면 위풍당당하다. 깍두기는 일상적인 밥상에서도 빛이 나지만 설렁탕을 먹을 때의 위엄이야말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소문난 설렁탕집의 깍두기는 깍두기 하나만으로도 식도락가(食道樂家)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새빨간 빛깔이 시각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부어 먹는 맛은 설렁탕 마니아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한다.
깍두기는 선짓국과 내장탕, 콩나물국밥, 소머리국밥, 뼈해장국, 북엇국, 다슬깃국, 재첩국, 순댓국, 육개장 따위의 해장국 상차림에도 꼭 등장하는 필수 반찬이다. 깍두기와 무김치는 둘 다 무로 담근 김치지만 모양이 다르다. 무를 깍둑썬 깍두기가 손가락 마디 크기의 정육면체 형태라면 무김치는 무를 길게 네 등분해 큼지막하게 자른 것이라 정해진 모양이 따로 없다.
무김치도 밥반찬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음식이다.
무를 소금에 절여 익힌 동치미도 무김치의 하나다. 총각김치는 총각무로 담근 김치다. 무를 얇게 썰어 간장에 절여 삭힌 무장아찌도 있다.
#바람 든 무
무를 고를 때 조심해야 할 게 하나 있다. 이른바 바람 든 무라고 말하는데, 무 속의 밀도가 성기어 푸석푸석하고 식감이 별로라 상품성이 없다. 손가락으로 두드렸을 때 통통거리는 소리가 나고 덩치에 비해 중량감이 부족하다. 바람이 나면 집안이 시끄럽고 바람이 들면 입맛이 달아난다.
#뭇국
육수 만들기
동네 마트에서 무와 청양고추, 닭다리 세트 두 팩을 샀다. 네 식구가 먹으려면 튼실한 닭다리 12개는 필요할 것 같았다. 양념 재료는 집에 다 있어 따로 사지 않았다. 뭇국용 육수부터 만들기로 했다. 큰 냄비에 정수기 물을 3분의 2쯤 차게 넉넉하게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냉동실에 보관 중인 다시마 1장과 멸치 20여 마리를 맛국물용 일회용 친환경 망에 넣고 불을 켰다. 분말형 복합 조미료인 쇠고기 다시다도 티스푼으로 한 숟가락을 떠 넣었다.
다시마 한 장과 멸치를 넣고 끓인 육수.
채 썬 무와 어슷하게 썬 청양고추
물이 끓을 동안 채칼로 무 껍질을 벗기고 무를 잘게 채 썰었다. 칼은 주방용 식칼 대신 과도(果刀)보다 조금 큰 중간 크기의 칼을 선택했다. 식칼은 부엌칼의 대명사이자 주부들이 주방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이지만 웬일인지 나는 처음부터 중간 크기의 칼이 편했다. 칼을 손에 쥐었을 때의 그립감이 식칼보다 편안하게 느껴졌고 식재료를 다듬고 써는 데에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의 문제인데 지금까지도 계속 중간 크기의 칼만 고집하고 있다.
채 썬 무와 어슷하게 썬 청양고추.
채 썬 무의 두께는 0.2~0.3mm 정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맞췄다. 어릴 때부터 뭇국을 많이 먹어본 내가 눈대중으로 짐작한 기준선이다. 일반 무 기준으로 5분의 2 정도를 채 썰고 청양고추 2개도 어슷하게 썰어 준비했다. 냄비 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다. 다시마를 집게로 덜어내고 채 썬 무와 다진 마늘을 집어넣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을 머금은 무채가 냄비 속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자 뜨겁게 달아오른 육수의 기세가 꺾이면서 끓는 소리가 숨을 죽였다. 5분 정도 지나 육수는 다시 비등점(沸騰點)을 돌파하며 기운을 되찾았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세차게 나면서 냄비에서 뿌연 김이 솟아올랐다.
채 썬 무채 군상(群像)이 끓는 육수와 만나자, 육수의 기세가 꺾이면서 끓는 소리가 숨을 죽였다
간 맞추기
청양고추를 손으로 집어 끓는 물 위에 흩뿌리듯 올리고 가는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소금의 양은 티스푼으로 한 숟가락 반에서 두 숟가락. 약간 싱겁게 먹는 우리 식구 입맛에는 그 정도의 간이 딱 맞았다. 중불로 불을 살짝 줄여 참기를 2~3방울을 떨어뜨리고 10분간 더 끓였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술 떠 맛을 봤다. 무의 몸속에 축적된 진액이 아낌없이 육수에 바쳐진 뭇국 국물의 시원한 맛과 청양고추의 칼칼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첫 도전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자평했다. 나중에 뭇국을 끓일 때는 후추를 살짝 치기도 했다.
완성된 뭇국.
뭇국과 소고기뭇국
뭇국은 무를 채 써는 일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끓이기가 무난했다. 식재료라고는 무와 청양고추가 전부인 단출한 요리법만큼이나 국물 맛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칼칼한 맛을 억누르고 싶다면 청양고추를 빼고 무만 넣으면 된다.
내가 끓이는 뭇국은 소고기가 들어가는 소고기뭇국과는 다른 음식이다. 소고기뭇국에는 소고기와 대파가 들어가고 무도 채썰기가 아니라 나박썰기한다. 나박썰기는 두께가 얇은 사각형 모양이다. 지역에 따라 두부를 넣기도 한다. 소금과 함께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소고기뭇국은 제사상에 올리는 탕(湯)국과 맛이 비슷하다. 우리집 식구들은 뭇국과 탕국 모두 다 좋아한다. 뭇국과 탕국은 어릴 때부터 아주 익숙한 음식이다.
대구의 명물 뭉티기 한 접시.
장마와 폭염(暴炎)이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다. 며칠 전 고향 대구를 찾았다. 4년 만에 만난 대학 친구와 대구의 명물(名物) 뭉티기 맛집에 갔다. 뭉티기는 소의 허리 아래쪽에서 허벅다리 위 좌우로 가운데 살이 불룩한 우둔(牛臀)살을 뭉텅뭉텅 썰어서 양념장에 찍어 먹는 생고기의 대구식 표현이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소고기뭇국을 먹게 됐다. 주인장의 예사롭지 않은 음식 솜씨 덕분에 오랜만에 입 호강을 했다.
대학 친구와 찾아간 식당에서 먹은 소고기뭇국. 나박썰기가 아닌, 깍둑썰기 한 무가 많이 보인다. 두부도 들어가 있다. 식당 주인의 음식 솜씨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 맛이었다.
투박하게 생긴 무가 참으로 다재다능한 식재료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무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