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밥상의 보약, 콩나물국
6. 밥상의 보약, 콩나물국
#콩나물국에 밥 말아 먹기
어릴 때 우리집 밥상에는 콩나물국이 자주 올랐다. 어린 나는 아버지처럼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을 좋아했다. 두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밥 따로 국 따로 대신 콩나물국에 왜 밥을 말아 먹는지는 몰랐다. 밥상머리의 좌장(座長)이자 가부장(家父長)인 아버지가 하는 방식이면 무조건 좋은 것인 줄 알고 따라 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늘 국에 밥을 말면 국밥이 되는데 국밥은 먹기가 편하고 소화도 잘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은 다 옳다고 생각한 우리 형제들은 식사 때마다 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은 콩나물.
흔한 식재료인 콩나물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하다. 식이섬유는 장 활동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섬유질 성분이다. 콩나물국이 소화력이 뛰어난 음식인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셈이다. 아버지가 콩나물에 함유된 식이섬유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마 오랜 음식 문화의 전통에서 경험적으로 축적돼 전해 내려온 구전(口傳) 정보의 소산(所産)일 것이다.
아버지의 말대로 국밥은 술술 잘 넘어갔다. 국밥을 먹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배가 꺼졌다. 소화가 잘되면 배가 빨리 꺼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소화가 잘되는 음식은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내려가는 시간이 짧다. 먹을 때는 배가 불러도 포만감이 지속적이지 않다. 곡물, 뿌리채소, 과일, 국수류와 같은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과 섬유질 성분이 그렇다. 단백질과 지방 성분의 음식은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내려가는 속도가 느려 포만감이 오래 계속된다.
육수가 끓으면 콩나물과 함께 넣을 청양고추.
#애주가들의 해장 음식, 콩나물국
아버지가 국을 좋아해 우리집 밥상에는 끼니마다 꼭 국이 나왔다. 식구들은 소고깃국, 북엇국, 뭇국, 배춧국, 시래기 된장국, 오징엇국, 시금칫국 따위를 번갈아 가며 먹었다. 희한한 점은 약주(藥酒)를 즐긴 아버지가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들어온 다음 날 아침 밥상에는 으레 콩나물국이 올랐다는 것이다. 콩나물국이 숙취(宿醉) 해소에 그만이라는 애주가(愛酒家)들의 불문율인 것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콩나물에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염기성 아미노산의 하나로 숙취 해소를 도와주는 아르지닌이 함유돼 있다. 과음한 다음 날 속이 쓰리고 머리가 띵할 때 콩나물국을 찾는 술꾼들의 버릇에도 이런 속뜻이 숨어 있다. 지금도 술을 애인처럼 섬기는 주당(酒黨)들에게 콩나물국은 여전히 인기다.
고층 빌딩이 밀집한 도심지 식당가의 콩나물국밥집은 점심시간이면 몰려든 회사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콩나물국밥은 콩나물국에 처음부터 밥을 말아 끓인 해장국이다. 숙취를 푼다는 뜻인 해장의 본딧말은 풀해(解), 숙취 정(酲), 해정(解酲)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소릿값이 변해 해장으로 음가(音價)가 정착됐다.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 끓이기
#콩나물국밥의 매력
대개 콩나물국밥은 펄펄 끓는 뚝배기 채 나온다. 달걀이 흐드러지게 풀어져 있고 양념통에 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다. 입이 델 것처럼 뜨거운 콩나물국밥을 호호 불며 한술 떠 넣으면 끈질기게 속을 괴롭히는 숙취(宿醉)가 스르르 풀린다. 쓰린 속을 달래려고 콩나물국밥을 시켜 먹으면서 또 소주잔을 기울이는 못 말리는 주당(酒黨)들도 있다. 이른바 해장을 하면서 마시는 해장술이다.
콩나물국밥의 뜨끈한 국물은 추운 겨울에 제격이지만 무더운 여름철에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맛도 잊을 수 없다.
광화문 한복판의 직장에 다닐 때 덕수궁 대한문 바로 옆 돌담길 맞은편 초입 건물 2층에 소문난 콩나물국밥집이 있었다.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 낡고 허름한 건물에 테이블이 여남은 개가 채 되지 않은 넓지 않은 매장이었다. 점심때만 되면 대기 손님들로 긴 줄을 이룬 맛집이었다. 동료들과 어울려 나도 즐겨 찾은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 자리에 피자 가게가 들어선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콩나물을 넣는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한치한(以寒治寒)의 음식
우리집 콩나물국은 오로지 소금으로만 간을 맞춘다. 엷게 썬 청양고추도 한 개 넣는다. 알싸한 청양고추의 기운이 국물에 녹아내려 속을 풀어주는 데 그만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콩나물국을 끓여 차갑게 식힌 뒤 데우지 않고 냉국처럼 그대로 먹으면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추운 겨울날 횟집에 가면 가끔 살얼음을 띄운 콩나물국이 밥공기에 담겨 나오는 일이 있다. 겨울에 먹는 찬 콩나물국은 의외로 날씨와 잘 어울리는 별미다. 여름에는 이열치열(以熱治熱), 겨울에는 이한치한(以寒治寒)의 음식이 바로 콩나물국인 셈이다.
콩나물에 이어 엷게 썬 청양고추도 넣는다.
#콩나물 비린내 잡기
어머니는 콩나물국을 끓일 때 루틴처럼 빼먹지 않은 습관이 하나 있었다. 끓는 물에 콩나물을 집어넣은 뒤 콩나물이 다 익기 전에는 냄비 뚜껑을 열지 않았다. 콩나물이 익기 전에 뚜껑을 열면 비린내를 유발하는 콩나물 효소가 죽지 않고 활동하기 때문이란다.
어머니는 5분 정도 지나서야 냄비 뚜껑을 열었다. 처음부터 냄비 뚜껑을 열고 콩나물 비린내를 잡는 방법도 있다. 육수용 물을 붓는 순간부터 콩나물을 넣고 콩나물이 익을 때까지 뚜껑을 계속 열어두는 것이다.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런 식으로 조리한 적이 있는데 콩나물이 익는 동안 콩나물 비린내가 솔솔 풍겨 내키지 않았다.
육수를 끓일 때 다진 마늘을 꼭 넣는 것도 콩나물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다진 마늘은 국과 탕, 무침 요리, 볶음 요리, 조림 요리, 김치 등 거의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약방에 감초 같은 양념이다. 감칠맛을 끌어올려 음식의 풍미(風味)를 더할 뿐 아니라 잡내 제거와 항암 효과까지 있는 만능 양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냄비 뚜껑을 닫고 5분 동안 팔팔 끓여 완성한 콩나물국. 물의 양에 비해 콩나물이 넉넉하게 채워져 있다.
콩나물국을 너무 오래 끓이면 콩나물의 아삭아삭한 식감이 반감된다. 불을 너무 빨리 끄면 감칠맛이 덜하고 자칫 비린 향이 날 수도 있다.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넣기도 한다. 맵고 얼얼한 국물 맛이 나는 칼칼한 콩나물국이다. 반면에 고춧가루는 콩나물에서 배어 나온 맑고 산뜻한 국물 맛을 누르는 경향이 있어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우리 식구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맑은 콩나물국을 좋아한다. 식구 중 누군가가 감기에 걸렸거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만 티스푼으로 한 숟가락 분량의 고춧가루를 넣어 끓이기도 한다.
#콩나물국 끓이기
다시마와 멸치로 우려낸 육수가 팔팔 끓으면 흐르는 물에 씻은 콩나물과 다진 마늘 1작은술, 잘게 썬 청양고추, 가는소금을 넣고 센불에 5분가량 더 끓이면 완성된다. 한 번씩 냉동 보관한 다진 마늘이 충분히 풀어지게끔 육수가 끓기 전에 미리 집어넣기도 한다. 소금의 양은 물의 양과 입맛에 따라 달라지기에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 나름이다.
국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진 콩나물국
싱거우면 소금을 추가하고 짜면 물을 조금 더 붓고 끓이면 된다. 다만 수선한 옷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듯이 육수도 처음에 의도한 양을 지키면서 간을 조절하는 방법이 제일 자연스럽다. 소금을 한꺼번에 많이 투입하지 말고 조금씩 더하면서 간을 보기를 추천한다.
간을 볼 때 콩나물 비린내의 여운이 느껴진다면 다진 마늘을 조금 더 넣어주는 것이 좋다. 콩나물국은 콩나물로만 끓이는 국이라 콩나물을 넉넉하게 넣어주어야 풍미를 살릴 수 있다. 큼지막하게 자른 무 한 덩어리를 넣고 끓이는 방법도 있다. 감칠맛과 시원한 맛이 향상된다. 집사람이 콩나물국을 끓이는 방식이다.
큼지막한 무 한 덩어리와 고춧가루를 넣고 끓인 콩나물국
뭇국처럼 콩나물국도 조리하는 방식이 지극히 간단명료하지만 희한하게도 맛은 다 다르다. 물의 양과 콩나물의 비율, 끓이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다. 다른 국에 비해 콩나물국은 식재료인 콩나물을 풍성하게, 끓이는 시간은 5분 이내에서 마감하는 게 내 나름의 요령이라면 요령이다.
콩나물국은 생선 요리나 고기 요리 등 어떤 메뉴와도 잘 어울리는 친화력이 뛰어나고 차게 먹어도 맛있고 몸에도 좋은 속풀이 국으로도 제격이라 이래저래 밥상 문화의 효자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콩나물국은 한국인들의 밥상에 단골로 오르는 보약 같은 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