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신도시에 산 지 20년이 지났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왔다. 행정구역상 일산 신도시는 일산동구와 일산서구 일대에 조성된 신도시로 정의된다. 내가 사는 곳은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이라 엄밀히 말하면 일산 신도시라 할 수 없으나 여기 주민들이 그렇게 부르니 나도 습관적으로 그러려니 한다. 어쨌거나 일산 신도시는 살기가 꽤 괜찮은 곳이다. 살아보면 안다.
한국인들은 아파트 시세에 민감하다. 일산 신도시의 유일한 약점이 존재하는 지점이다. 아파트 시세는 일산 신도시 주민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억울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동일한 시기에 신도시로 출발한 분당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애당초 주거 공간의 목적은 삶이지 투자가 아니었을진대, 언제부턴가 아파트와 투자는 한 몸이 되어버렸다. 한국적 현상이다.
아들과 딸 모두 이곳 경기도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둘 다 남부럽지 않은 대학을 졸업했고 번듯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마다 부러워할 것도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테이크아웃 포장 용기에 든 내용물. 고춧가루에 가려 보이지 않는 돼지고기와 김치가 들어 있다.
#행신역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외환 위기가 발발하기 직전에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전세를 놓고 서울에서 살다가 2003년 3월 초 입주했다. 2004년 4월 고속철도 시대가 열렸다. 고속철도, KTX의 상행선 마지막 역은 행신역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행신역은 역사(驛舍) 안에 고속철과 전철을 다 끼고 있다. 전철 노선은 경의 중앙선인데 옛 경의선 노선을 전철로 확장 건설한 코레일 라인이다.
행신역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행신역 2번 출구 건너편 대로변에 KTX 개통 초기에 문을 연 음식점이 하나 있다. ◯◯◯ 생 두루치기라는 상호(商號)와 달리 김치찌개 전문 식당이다. 이 집에서 내놓는 음식은 김치찌개 하나밖에 없다. 김치찌개는 된장찌개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토속적인 음식이다.
어딜 가나 널려 있는 김치찌개는 그 수만큼이나 맛도 다 다르다. 김치와 돼지고기로 끓인 김치찌개는 만만해 보이지만 입맛에 맞는 맛을 내기가 쉽지 않다. 김치 맛이 다 다르고 고기의 신선도와 육질, 양파와 대파 등 채소에 더해 육수의 풍미(風味)를 위해 추가하는 양념 따위가 전부 한데 어우러져 최종적인 맛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천차만별인 김치찌개의 맛
집에서 끓이는 김치찌개도 그렇고 밖에서 먹는 김치찌개의 맛도 음식점마다 천차만별인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사람과 나도 숱하게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때마다 매번 먹을만하다는 정도일 뿐, 무릎을 치게 만드는 희열의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김치찌개 요리의 지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행신역 김치찌개 식당의 맛은 그런 점에서 고수의 맛이라 불러 손색이 없을 것이다. 주말 밥상 메뉴로 김치찌개를 올릴 때마다 이 집의 김치찌개가 오버 랩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는 맛있는 김치찌개의 실체를 외부 사례를 빌려 내 나름의 분석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감상이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용기에 든 내용물을 냄비에 쏟자, 양념장으로 밑간을 한 돼지고기가 보인다.
#행신역 김치찌개 식당
개업 초기, 행신역 김치찌개 식당은 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순식간에 동네 맛집으로 알려졌다. 나도 이곳으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됐다. 얼얼하면서 강렬한 맛이 나는 김치찌개의 첫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인상을 미각적으로 표현하자면 얼큰하면서 맛이 깊어 먹고 나면 몸이 개운해졌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지만 이 집의 김치찌개는 확연한 비교 우위의 독특한 맛이라 잊을만하면 찾게 되는 중독성이 있다. 비교 우위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맵고 얼얼한 첫맛에서 시작해 달짝지근한 중간 맛을 지나 마지막에는 감칠맛이 당기는 여운을 진하게 남긴다는 점이다. 세 가지 맛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데 맛의 근원은 실체가 궁금한 양념과 김치, 돼지고기가 합심해서 빚어낸 육수에 있다.
비닐봉지에 따로 포장한 양파와 대파를 마저 넣고 내용물이 충분히 잠길 만큼 물을 충분히 부은 모습.
다른 하나는 곰삭은 김치의 신맛이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풍미와 돼지고기 육질의 우수성이다. 살점과 비계가 2대 1 비율인 두툼한 직사각형 모양의 돼지고기가 제법 많이 들어 있다. 날고기의 빛깔과 형태에서 싱싱함이 눈에 보이는데 팔팔 끓인 후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으면 돼지고기의 몸에서 액화(液化)해 빠져나온 육즙(肉汁)이 혀에 착착 감긴다. 고기의 맛은 살점 덩어리보다는 육즙에 좌우된다. 신선한 고기일수록 육즙이 살아있고 육즙이 살아 있으면 식감도 뛰어나기에 신선한 고기가 좋은 것이다.
#구분식재(九分食材) 일분공예(一分工藝)
식당 내부 벽 위에 눈길을 끄는 글이 적혀 있다. 내용은 이렇다.
‘구분식재(九分食材) 일분공예(一分工藝)’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 아래에 ‘맛있는 음식은 90%의 좋은 식재료와 10%의 조리 기술로 결정된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식당 사장의 경영 철학일 것인데 공감한다. 식재료가 나쁘면 천하의 미슐랭 셰프도 어쩔 도리가 없다.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재료와 음식 솜씨의 비율을 7대 3으로 평가하는 외식 조리업계의 불문율과도 일맥상통한다.
김치찌개가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불을 조절한다.
그러나 최상의 식재료라도 조리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음식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리 방법과 손맛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식당 사장의 음식관은 신선하고 품질이 뛰어난 식재료가 모든 음식을 조리하는데 선결돼야 할 필요조건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오래전 KTX 객실에 비치된 월간 KTX 매거진에 행신역 주변 맛집으로 소개됐을 정도로 유명해진 김치찌개 식당은 가게 터를 넓히고 나서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요즘도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이 식당의 김치찌개를 꼭 먹게 되는데 초심을 잃지 않은 사장의 운영 방침이 음식맛에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테이크아웃 방식으로 그 식당의 김치찌개를 사 와 집에서 끓여 먹는 편이다. 주말이면 내가 사는 아파트를 지나 행신역에서 강매역 사이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한 바퀴 도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돌아오는 길에 김치찌개 식당에 들러 2인분 포장 주문을 해 와 집사람과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알맞게 얼큰하고 아린 김치찌개의 식탐에 빠지곤 한다. 김치찌개를 먹는 날엔 계란찜과 김, 오이, 풋고추도 식탁에 오르는 날이다.
30분 동안 끓여 완성한 김치찌개.
#김치찌개의 추억
포장 용기에는 식욕을 부추기는 매콤한 향이 코를 자극하는 양념장으로 밑간을 한 돼지고기와 김치가 들어 있다. 비닐봉지에 따로 포장한 채소는 대파와 양파, 두 가지뿐이다. 양파와 대파가 손가락 크기로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게 특징이다. 돼지고기와 김치, 채소를 한꺼번에 냄비에 붓고 처음부터 같이 끓이면 된다. 물은 김치찌개를 구성하는 내용물이 충분히 잠길 정도로 붓는데 눈대중으로 손바닥 두 개 남짓 엎은 높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집 방식이라 물의 양은 취향과 입맛에 따라 조절하기 나름이다.
추가로 집어넣는 양념은 일절 없다. 센불로 열을 가해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수위(水位)를 낮춘 뒤 계속 끓인다. 국물이 넘칠 것 같으면 냄비 뚜껑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인다. 내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시간의 총량은 30분 언저리다. 경험상 30분 이내로 끓였을 때 육수가 진하게 우러나 감칠맛이 풍부하고 돼지고기의 육질도 부드럽게 씹혔기 때문이다. 이 또한 개인 취향이라 끓이는 시간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김치찌개와 달걀찜, 김과 오이와 풋고추 등으로 차린 밥상.
비록 김치와 식재료, 양념 모두 신세를 진 음식이지만 끓이는 것만큼은 스스로 한 ◯◯◯ 생 두루치기를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이 샘솟는다. 잊을만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김치찌개이고 만만한 듯 절대 그렇지 않은 음식도 김치찌개다. 김치찌개의 추억은 집밥의 추억이자 한국인의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