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배춧국
12. 배춧국
#배춧국과 우리집 식문화(食文化)
배춧국은 구수하면서 달고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육수를 끓여 된장을 풀고 속이 꽉 찬 배춧속을 넣어 조리한 음식이 배춧국이다. 배춧국을 보면 어릴 때 고향집 장독대가 생각난다. 기와집 대문 옆으로 난 시멘트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여러 개의 장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된장이 가득 담긴 된장독이다. 또래의 어머니들처럼 어머니도 된장을 담그기 위해 메주를 손수 띄웠다.
식성(食性)은 어릴 때 형성된다고 내가 배춧국을 좋아하는 것처럼, 아들과 딸도 배춧국을 잘 먹는다. 동년배와 비교해 배춧국을 비롯한 토속적인 음식에 익숙한 아이들 식성도 우리집 식문화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노릇노릇한 배춧속
#지금은 없어진 무교동 비빔밥집
무교동에 배춧국 맛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낡고 보잘것없는 식당이 하나 있었다. 볼품없는 외관과 달리 근처 직장인들에게 점심 식사 장소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부부 두 분이 운영했던 집인데 오전 11시가 조금 넘자마자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11시 30분쯤이면 빈자리가 없다. 낮 12시 무렵에는 가게 앞 좁은 골목길에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길가는 행인들이 비켜 지나가곤 했다. 평일 점심때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다시마와 멸치의 건강한 기운이 우러난 육수
특이한 내부 구조
가게는 인상에 남을 정도로 아주 좁고 허름했다. 식탁이 따로 없고 양쪽 벽을 마주 보고 가로로 길게 이어진 철제 테이블과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식사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식당이었다. 이 집에서는 일행이 있더라도 마주 보고 식사할 일이 없다. 옆으로 붙어 앉아 벽을 보고 먹어야 하는데도 불편해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교 불가(不可)의 음식 맛 때문이다.
가게가 워낙 작고 허름해 바 형태의 양쪽 테이블을 다 채운다 해도 15명이 들어갈까 말까다. 눈앞에 보이는 대기 줄을 의식해 손님들도 눈치껏 서둘러 식사를 끝냈다. 여느 식당보다 대기 시간이 짧고 자리 회전이 빠른 이유다.
육수가 끓을 동안 배춧속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청양고추도 준비한다.
할머니표 비빔밥
메뉴는 오로지 하나, 비빔밥이다. 배춧국이 딸려 나온다. 나처럼 비빔밥보다 배춧국 생각에 가는 사람도 많아 딸려 나온다기보다 독립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조합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먹는 방식이 흥미롭다. 자리에 앉으면 할아버지가 밥만 담긴 비빔밥용 큰 대접을 내오고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배춧국 한 그릇을 옆에 놓는다.
비빔밥은 각자 알아서 만들어 먹는다. 테이블에는 대략 1m 간격으로 비빔밥에 들어갈 고명을 담은 반찬통 여러 개와 김치통, 고추장 종지, 참기름병, 생김을 구워 자른 김 통 따위가 놓여 있다. 비빔밥용 고명으로는 콩나물과 무말랭이를 고춧가루 양념으로 버무린 오그락지, 배추 나물, 시래기 무침 따위의 나물 반찬 몇 가지와 깻잎, 쥐똥고추, 김이 전부다.
밥에 고명을 올리고 고추장과 강된장을 넣고 비벼 먹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방식인데 맛은 일품요리(一品料理) 저리 가라다. 고명은 모두 할머니가 직접 조리한 것들이다.
육수가 끓으면 된장을 풀어 넣는다.
고명은 물론 김치와 고추장에도 할머니의 손맛이 배어 있다. 비빔밥은 나물도 나물이지만 고추장이 맛있어야 맛이 제대로 난다. 이 집의 비빔밥 맛을 잊을 수 없는 것도 할머니가 손수 담근 고추장 때문이다. 되지도 질지도 않게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과 고명, 고추장과 참기름이 하나로 뭉쳐 만들어낸 할머니표 비빔밥의 풍미는 어떤 음식과 견주어도 족탈불급(足脫不及)이었다.
배춧국의 우월적 존재감
이 지점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다. 비빔밥과 곁들여 먹는 배춧국의 우월적 존재감이다. 광화문 일대의 직장인들이 앞다퉈 먹고 싶은 점심이라고 상찬(賞讚)한 할머니표 비빔밥은 비빔밥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체 불가의 배춧국이 없었다면 할머니표 비빔밥의 효용성도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알다시피 배춧국은 된장을 푼 육수에 배추 속잎을 넣고 끓인 소탈한 국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배춧국에서 할머니는 특별한 맛을 우려냈다.
된장에 이어 고춧가루도 한 큰술 넣는다.
어릴 때부터 줄곧 좋아해 배춧국의 시원한 맛을 잘 알고 있던 나도 처음 할머니표 배춧국을 먹었을 때 감탄사를 연발했다. 할머니가 끓인 배춧국은 얼큰하면서 시원하고 달았다. 배춧국을 삼켰을 때의 얼큰함은 매운탕의 그것과는 달랐고 다름은 메주 뜨는 솜씨가 남달랐을 할머니표 집된장과 배추가 섞여 빚어낸 비교 불가의 풍미에 있었다.
바로 옆집이 알아주는 북엇국 맛집이었는데도 나처럼 술이 덜 깬 애주가들은 할머니가 끓인 배춧국 생각이 간절했다. 할머니표 배춧국은 해장 효과도 탁월해 숙취 해소와 집밥의 향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꺼번에 충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춧속과 청양고추를 넣은 뒤 중불로 계속 끓인다.
나는 비빔밥은 반의반만 먹고 배춧국만 코를 박고 퍼먹었다. 나는 늘 배춧국 두 그릇을 먹었다. 맛있는 집은 물어서라도 찾아가고, 멀어도 찾아가고 힘들어도 찾아간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무교동의 비빔밥집은 맛집 중의 맛집이었다.
#식은 죽먹기보다 쉬운 배춧국 끓이기
주말에 먹을 국으로 배춧국을 자주 끓인다. 집된장은 옛말이라 시판용(市販用) 된장으로 배춧국을 끓일 수밖에 없다. 조리법은 식은 죽먹기보다 쉽다. 다시마 한 장과 멸치 열댓 마리로 육수를 내고 된장 두세 큰술과 배추 속잎, 다진 마늘, 고춧가루 한 큰술, 청양고추 1~2개를 넣고 20분 남짓 중불에서 팔팔 끓이면 먹을 수 있다.
비등점을 돌파한 배춧국에서 펄펄 끓는 소리가 나면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5분쯤 지나 불을 끈다.
배추는 한입에 들어갈 크기로 잘라 육수에 충분히 잠길 정도의 양을 준비하면 된다. 육수에 사용하는 물은 1.5리터 정도다. 물의 양은 기호에 따라 다 달라 정답이 없으나 배추가 익으면서 수분을 뱉어내기에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싱거우면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식탁에 오른 배춧국에 시원하고 단맛은 살아 있으나 뭔가 아쉬운 감을 떨칠 수 없는 이유도 결국 집된장의 아우라가 증발한 된장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마트에서 집된장이라고 파는 제품도 옛날 집에서 담근 토속 된장과 같은 맛일 수는 없다.
배춧국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고 행복하다.
배추에는 칼슘과 비타민이 많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장(腸) 건강에도 좋다. 배춧국은 또 식재료 구매에 드는 비용 부담이 거의 없어 아주 경제적이다. 잘 끓인 배춧국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