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해 먹기 곤란한 음식이 있다. 주로 탕(湯)자가 들어간 음식인데 한결같이 집에서 식재료를 손질하기에는 난감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생선 매운탕과 추어탕, 설렁탕, 도가니탕, 꼬리곰탕, 갈비탕 따위가 그런 것들이다. 이런 음식들은 밖에서 사 먹거나 식당에서 포장 구매해 와 끓여 먹어야 한다.
그나마 매운탕 거리는 나은 편이다. 마트에서 밀키트 형태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정육점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손수 핏물을 제거한 뒤 조리할 수도 있다. 도가니탕, 꼬리곰탕, 갈비탕 따위가 그런 것들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만족스러울지는 의문스럽다.
오늘 음식의 주인공은 추어탕이다. 추어탕은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의 빠지지 않는 그룹에 속할 것이다. 복국과 설렁탕, 순대국밥도 그렇고 육개장과 갈비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 집밥의 훌륭한 대체재들이다. 사서 먹을 수밖에 없는 추어탕을 굳이 주말 밥상의 소재로 꺼내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베이비 붐 세대라면 누구나 추어탕에 관한 추억 한 가지쯤은 있을 것이고, 더 이상 집밥 메뉴로는 보기 힘든 추어탕이 지금도 여전히 사계절 건강식으로 존재감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식탁에 올릴 밥상 메뉴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마다 집사람이 수호천사처럼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자고 말해 한숨을 돌리게 된다. 혼자 끙끙대는 내 마음을 눈치챈 배려에서인지, 비슷비슷한 집밥에 질릴 때가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앓던 이가 빠져 홀가분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동향(同鄕)인 집사람도 나처럼 추어탕을 좋아한다. 동네 맛집인 추어탕집에도 한 번씩 가고 근교의 추어탕 명소에도 가끔 간다. 서울의 추어탕 식당은 거의 다 남도식이고 경상도식은 미리 좌표를 찍고 찾아 나서야 먹을 수 있다. 서울식은 더욱 귀하다. 다행히 시청 근처에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는 서울식 추어탕 노포(老鋪)가 있다.
경상도식 추어탕 상차림. 부추김치와 오징어채볶음, 고구마 줄기 볶음이 보인다.
#처음 본 미꾸라지의 생경함
추어탕,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장면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을 것이다. 동네 골목길에서 뛰놀다 해거름에 집 대문을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랄 광경을 목격했다. 큼지막한 대야에 손가락만 한 물고기 수십 마리가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요란하면서도 신기했다. 처음 본 미꾸라지는 얄궂었으나 덩치에 비해 역동적이고 힘이 세 보였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재래시장에서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사 와 집에서 추어탕을 끓여 먹었다.
#추어탕 끓이기
추어탕은 끓이기 전 준비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시장에서 미꾸라지를 구매한 어머니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소금물로 해감을 시키는 것이었다. 갓난아기를 목욕시킬 만한 큰 대야에 물을 가득 채우고 굵은소금을 뿌린 뒤 미꾸라지를 풀어놓으면 펄쩍 뛰다 못해 날아오를 듯 몸부림을 쳤다.
얼마나 기운이 좋은지 주체를 못 하는 몇몇 놈들은 대야 밖으로 뛰어올라 마당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놈들은 하는 수 없이 손으로 쥐고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릴 수밖에 없는데 몸 전체가 미끌미끌해 자꾸 빠져나가는 바람에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옮기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해감할 동안 어머니는 추어탕에 들어갈 우거지와 토란, 부추, 대파, 고추를 손질하고 다진 마늘과 양념장도 미리 만들었다. 10여 분에 걸친 해감 작업이 끝나면 밀가루로 혼절한 미꾸라지를 여러 번 치대 불순물을 뺀 뒤 큰 솥에서 푹 삶았다. 살이 흐물흐물해지도록 삶긴 미꾸라지를 꺼내 절굿공이로 빻아 체에 곱게 걸러야 비로소 추어탕 요리 준비가 끝났다. 미꾸라지를 푸짐하게 넣고 끓인 추어탕은 어죽 같아 대야에서 날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속풀이 해장국이자 건강식인 추어탕
추어탕(鰍魚湯)은 미꾸라지를 끓인 탕이다. 미꾸라지 추(鰍), 고기 어(魚)로 형성된 탕의 이름 추어가 미꾸라지의 한자 명칭이다. 추어탕은 가을에 먹을 때 가장 맛있다고 하는데 한자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미꾸라지 추(鰍) 자를 뜯어보면 고기 어(魚) 변에 가을 추(秋)가 더해진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추어탕의 제철은 가을부터 겨울까지라지만 실제로는 사시사철 즐겨 먹는 음식이다. 맛도 맛이지만 속풀이 해장국으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타민과 무기질 등 몸에 좋은 성분이 많아 무더운 여름에 기력을 보충하는 건강식으로도 이름이 높다.
미꾸라지는 논이나 못, 개울의 진흙 속에서 유기물을 먹고 사는 민물고기다. 몸이 길고 가늘고 미끄러워 손으로 거머쥐기가 어렵다. 행동거지가 얄미울 정도로 약삭빠른 사람을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라고 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다 흐려 놓는다고도 한다.
둘 다 미꾸라지의 생태학적 특성과 생김새에서 비롯된 것인데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는 표현이다. 비유적 용례와 관계없이 추어탕은 영양학적으로도 손에 꼽을 만한 음식이고 미식가(美食家)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키는 별미로도 손색이 없어 미꾸라지로서는 억울해할 만도 하다.
미꾸라지는 서식지가 진흙 속이라 비릿하면서 눅눅한 흙냄새가 난다. 푹 삶아서 간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이는 것도 그렇고 맛과 향이 강한 산초가루와 다진 마늘, 고추 양념장, 된장, 들깻가루를 사용하는 이유도 이런 잡내를 없애고 풍미(風味)를 살리기 위해서다.
남원식 추어탕 상차림. 밑반찬으로 나온 추어튀김도 맛볼 수 있다.
#지역색이 강한 추어탕
추어탕은 지역색이 강한 음식이다. 전라도식과 경상도식이 다르고 서울식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결국 맛의 차별성과 음식의 특징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맛을 결정하는 요인은 양념이라 지역별 추어탕을 정의하려면 양념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탕에 들어가는 부재료(副材料)나 조리 방법, 육수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역시 음식 맛을 좌우하는 영향력의 정점에는 양념이 버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원식
남원식으로 대표되는 전라도식 추어탕에는 삶아서 간 미꾸라지와 된장에 버무린 우거지, 들깻가루, 고춧가루, 생고추, 파, 부추, 다진 마늘, 산초가루가 들어간다. 된장과 들깻가루를 넣고 끓여 국물이 걸쭉하고 구수하다. 우거지 대신 시래기를 쓰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부재료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도 한다.
남원식 추어탕은 된장과 들깻가루가 들어가 국물이 걸쭉하고 구수하다.
경상도식
경상도식은 우거지와 토란, 부추, 대파, 깻잎과 비슷하게 생긴 방앗잎에다 한 움큼의 다진 마늘과 고추 양념장, 고추, 산초가루를 넣고 조리하는 방식이라 싸하고 얼얼한 향이 올라오면서 칼칼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남원식과 서울식에 비해 날것 그대로의 추어(鰍魚) 맛을 느낄 수 있다.
먹기 전에 산초가루를 한 번 더 치고, 입맛에 따라 채 썬 청양고추와 홍고추, 다진 마늘, 양념장도 각자 알아서 추가한다. 잡내가 나지 않고 알싸한 향이 입맛을 돋우어 밥 한 공기를 금방 비우게 된다.
경상도식 추어탕은 싸하고 얼얼한 향이 올라오면서 날것 그대로의 추어(鰍魚) 맛을 느낄 수 있다.
서울식
서울식 추어탕은 국물이 붉은 게 특징이다. 된장을 푼 남도식이 짙은 갈색이고 고추 양념장이 들어간 경상도식이 희뿌옇게 맑은 색인 것과 대조적이다. 된장이 아닌 고춧가루 양념이 맛의 기본인 서울식 추어탕의 겉모습은 육개장과 비슷하나 맛은 전혀 다르다. 첫술의 풍미가 약간 매캐하나 심심한 맛이 은은하게 입속을 맴돌아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식은 양지머리와 소 곱창을 삶아 육수를 우려낸다. 서울식 추어탕에는 또 두부와 버섯, 유부, 소 곱창, 파, 풀어진 달걀, 고사리, 소면 사리 따위의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부재료(副材料)로 요리하는 게 특징이다. 육수를 만드는 방식과 부재료의 차별성이 뚜렷해 남도식이나 경상도식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다.
통인시장 근처의 서울식 추어탕 상차림. 밑반찬으로 나온 숙주나물무침이 인상적이다.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온마리째 끓인 통추어탕과 갈아서 끓인 추어탕 두 가지가 있다. 통추어탕은 난도(難度)가 만만찮아 먹을 줄 아는 사람만 시켜 먹는다고 한다. 서울식은 원래 통추어탕으로 출발했으나 찾는 고객이 많아지자 갈아서 끓인 추어탕도 팔기 시작했다.
청계천과 이웃한 다동(茶洞)에 1932년에 오픈한 전국구급 서울식 추어탕집이 있다. 한자 상호를 우리말로 풀면 황금이 샘솟는 집이라 장사가 번창해 돈을 많이 벌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90년대 후반에 이 집에서 멋모르고 통추어탕을 주문한 적이 있었는데 국물만 먹고 나온 기억이 있다.
약간 매캐하면서 심심한 맛이 특징인 서울식 추어탕. 두부도 보이고 버섯도 눈에 띈다.
통인시장 근처에도 서울식 추어탕 가게가 있다. 다동 가게와 한 집안으로 뿌리가 같고 상호(商號)도 같다. 곱창 육수를 사용하는 다동과 달리 사골로 육수를 내고 부재료도 약간 차이가 있다. 서울식 추어탕과 남도식 추어탕 두 종류를 판다.
종로구 평창동과 동대문구 용두동에도 일제강점기 때부터 문을 연 서울식 추어탕 노포가 있었으나 지금은 두 군데 다 명맥이 끊겼다.
통인시장 근처의 서울식 추어탕 식당 입구.
#고등학교 친구의 일화(逸話)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은 이런 얘기도 들려주었다. 어릴 때 대구 수성못 근처에 살았는데 집 주변으로 논밭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라고 하니 1970년대 초쯤일 것 같다.
비 오는 여름철에 집 밖으로 나가면 논두렁 사이에 낸 물고랑 수풀 밑 진흙 속에 미꾸라지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뜰채로 낚아채 진흙을 털어내면 미꾸라지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는데 한두 시간 만에 잡은 양이 대야에 한가득 찰 정도로 푸짐했고 그날 저녁은 여덟 식구가 둘러앉아 추어탕을 맛있게 먹는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대구의 외곽지였던 수성못 일대가 지금은 대구의 신도심(新都心) 번화가로 변해 아이들이 미꾸라지를 잡는 풍경은 더는 볼 수 없는 아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지금 시중에서 유통되는 추어탕은 거의 다 중국산 미꾸라지 치어(稚魚)를 수입해 양식한 미꾸라지를 끓인 것이다.
2016년 3월 19일 삼성라이온즈파크 개장 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이었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근처에 경상도식 추어탕 식당이 있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추어탕 맛집이라 경기 전 야구장 기자실로 배달시켜 많이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1990년대 초였다. 명절 연휴 때 대구 처가(妻家)에서도 추어탕을 끓였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고만 그리운 추억으로만 남았다.
추어탕은 언제 먹어도 맛있는 사계절 음식이다. 칼슘과 단백질, 비타민 D 등 영양소가 많아 요즘처럼 무덥고 땀을 많이 흘리는 날, 추어탕 한 그릇이면 기력(氣力)도 살아나고 입도 즐거워진다. 내일 낮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추어탕 한 그릇을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