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누룽지와 숭늉
22. 누룽지와 숭늉
#가정식 백반
내가 점심을 먹으러 자주 가는 식당이 있다. 자주 가는 이유는 요즘에는 보기 힘든 가정식 백반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밑반찬에 된장찌개와 가자미구이로 차려진 백반을 이곳에서는 시골밥상이라 부른다. 된장찌개와 가자미구이는 고정 메뉴, 밑반찬은 그때그때 다른 모습이다.
이곳의 음식은 모두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이 손수 만든 것이라 맛도 좋고 외형이 집밥을 연상케 해 정감이 남다르다. 특히 집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맛이 일품이다. 주인아주머니의 친정어머니가 직접 메주를 띄워 만든 집된장만의 구수한 풍미가 그득해 입맛이 까다로운 손님들도 다 반기는 눈치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손님들은 주로 단골이 많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자주 찾는다. 음식의 맛과 품질에 비해 값도 비싸지 않아 한 번 정을 붙이면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내가 자주 가는 식당의 가정식 백반 상차림.
#식후 디저트 겸 소화제, 숭늉
내가 이곳에 마음을 주는 이유는 또 있다. 옛날에는 집밥을 먹고 난 뒤 빠뜨리지 않고 챙긴 후식이 하나 있었다. 밥솥 바닥에 눌어붙은 눌은밥에 물을 붓고 끓인 숭늉이란 이름의 입가심용 디저트다. 밥알이 미음처럼 부드럽게 풀어진 숭늉은 구수한 맛이 예사롭지 않아 음식을 먹고 난 입안을 개운하게 하고 더부룩한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소화제 역할을 한다. 숭늉을 상용(常用) 먹거리로 제공하는 식당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세상이기에 이곳의 매력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업소용 초대형 보온 밥솥에 항상 숭늉이 끓고 있는 광경이 신기해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주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전기밥솥에서는 눌은밥이 눌어붙지 않아 우리집에서는 꼭 압력밥솥으로 밥을 합니다. 하루에 두 번 밥을 짓는데 솥 밑의 눌은밥을 숭늉 전용 보온 밥솥으로 옮겨 물을 붓고 하루 종일 끓입니다.”
식후 디저트로 먹는 구수한 맛의 숭늉
주인아주머니의 말처럼 전기밥솥으로는 눌은밥을 만들 수 없다. 눌은밥, 즉 누룽지가 없으면 숭늉도 없다. 가마솥으로 상징되는 숭늉 문화는 전기밥솥의 등장과 함께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전기밥솥이 보편화되면서 한동안 사라지다시피 한 누룽지의 존재감을 되살린 것이 밥솥 문화의 정점이랄 수 있는 압력밥솥인 셈인데 귀찮아서인지, 찾는 손님이 없어서인지 둘 다인지는 몰라도 숭늉을 내놓는 식당은 아주 드문 실정이다.
요즘 압력밥솥은 취사는 물론 누룽지를 비롯해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장착돼 있는 만능 요리 기구다. 내 생각으로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숭늉을 만드는 데 필요한 또 다른 밥솥 마련에 따른 비용 부담과 함께 매번 숭늉을 끓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행위 자체가 성가시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바싹 말린 누룽지. 입이 심심할 때 하나씩 씹어 먹으면 고소한 맛이 솟아나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주전부리다.
#파생 식품인 눌은밥의 다양한 용도
전기밥솥 시대 이전에는 밥을 지으면 필연적으로 눌은밥이 생성됐다. 가마솥이든, 일반적인 형태의 솥이든 밥을 짓고 나면 눌은밥이 눌었고 눌은밥으로 숭늉도 끓여 먹고 눌은밥을 바싹 말린 마른 누룽지를 주전부리로도 즐겨 먹었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도 식사 때마다 숭늉이 나왔고 남은 눌은밥은 마른 누룽지로 만들어 먹었다. 먹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마른 누룽지는 맛도 있고 오도독오도독 소리를 내며 씹어먹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안겨준 요긴한 간식거리였다.
누룽지탕은 말린 누룽지만 있으면 물을 붓고 끓여 금방 먹을 수 있는 초간편 먹거리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가정용 밥솥으로 밥을 지었다. 알루미늄 솥에 쌀을 안치면 밥이 끓기 시작하면서 밥물이 넘치는데 때를 놓치지 않고 솥뚜껑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불을 낮춰야 한다. 가끔 밥물이 한참 넘치고서야 뒤늦게 솥뚜껑을 열고 수선을 떠는 적도 있었다. 밥물이 솥 밖으로 흥건하게 흘러넘쳐 부뚜막이 홍수를 이뤘고 연탄불에도 떨어지는 등 한바탕 난리를 떤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냄비에 누룽지를 넣고 적당량의 물을 붓는다.
말린 누룽지
취사가 완료되면 식구 수대로 밥그릇에 밥을 다 퍼 담고 눌은밥 윗부분을 밥주걱으로 긁어내 다른 그릇으로 옮긴 뒤 솥에 물을 붓고 다시 끓였다. 식후에 먹는 숭늉을 만들기 위해서다. 밥주걱으로 긁어낸 눌은밥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아 바싹해질 때까지 대청마루 한 곳에서 말렸다. 누룽지는 밥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왔고 말린 누룽지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누룽지가 팔팔 끓을 때 요리용 주걱으로 두세 번 저어준 뒤 불을 끈다.
누룽지탕
숭늉은 식후 디저트 말고도 긴요한 쓰임새가 있었다. 입이 까칠해 밥맛이 없을 때 숭늉에 밥을 말아 먹으면 술술 잘 넘어갔다. 밥과 숭늉을 동시에 먹는 셈인데 목 넘김이 수월하고 김치와 먹는 궁합이 괜찮았다. 대청마루 소쿠리에 쌓인 마른 누룽지가 줄어들지 않을 때는 누룽지탕을 끓여 먹었다. 누룽지탕은 마른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초간편 식이다. 마른 누룽지를 남김없이 처리하는 방식이기도 했고 식사 대용 한 끼 식사로도 그만인 별미였다.
입맛이 없을 때 누룽지탕을 끓여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한 끼 식사로도 그만이다.
누룽지 뻥튀기
마른 누룽지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먹었다. 동네 재래시장마다 진을 치고 있었던 뻥튀기 장수에게 가져가 누룽지를 튀겨 뻥튀기로 먹는 것이었다. 마른 누룽지를 그냥 먹는 것보다 부드러우면서 고소했고 바삭거리는 소리에 귀가 즐거웠다.
먹거리가 넘쳐흐르는 요즘에 누룽지를 집에서 일부러 만들어 먹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집 압력밥솥에도 누룽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도 누룽지 버튼을 눌러본 적이 없다. 대신 마트에서 파는 누룽지를 한 번씩 사다가 생각날 때마다 물을 붓고 끓여 먹는 것으로 향수를 달랜다.
밥을 짓고 난 뒤의 부산물(副産物)로 일종의 파생(派生) 식품인 누룽지에는 정겨운 사연과 추억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