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논산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
4. 논산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
#기초군사훈련
교육연대로 이동한 다음 날부터 5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이 시작됐다. 기초군사훈련은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으로 군인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다. 훈련병들은 사고(事故) 등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병적(兵籍) 상으로는 입영한 순간부터 이등병 신분이나 실제로는 수료식 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신고식을 하면서 비로소 신병(新兵)이 된다.
내가 훈련소에서 교육받은 훈련 교과목(敎科目)은 ▲군인의 규율과 행동의 절도를 배우는 제식(制式)훈련과 ▲정신 교육, ▲화생방훈련, ▲경계, ▲구급법, ▲소총 조작 및 사격술훈련, ▲영점사격, ▲기초사격, ▲수류탄 훈련, ▲각개전투, ▲체력 검정, ▲보안 교육, ▲유격훈련과 40km 행군, ▲수료식 등이었다. 지금은 유격훈련을 자대 배치 후 실시하는 것으로 교과목이 변경됐다고 한다. 행군 거리도 20km로 단축됐다.
#부족한 잠과 무더위와의 사투(死鬪)
기초군사훈련의 강도는 그리 센 편이 아니었다. 정작 훈련병들이 힘들어한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부족한 잠과 더위야말로 훈련병들을 괴롭힌 공공의 적이었다. 더워서 잠 못 들고 불침번 서느라 잠을 설친 탓에 훈련 도중 나도 모르게 깜빡깜빡 조는 일이 발생했고 다른 훈련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그럴 때마다 조교의 눈에 발각되기 전에 정신을 차려 얼차려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5주 차 훈련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얼차려를 받지 않고 무사히 훈련소를 떠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입소(入所) 시기가 한여름이라 무더위로 인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일 30도를 우도는 폭염(暴炎)에 훈련병들도 힘들어했고 조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땀범벅이 된 훈련 중간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고 그럴 때마다 탈진과 탈수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정제된 굵은소금 한 움큼을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켰다. 돌이켜보건대 혹서기(酷暑期)에 입소한 악조건이 오히려 훈련의 강도를 누그러뜨리는 데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날마다 푹푹 찌는 날씨에 맨땅에서 뒹굴다 보니 온몸이 먼지와 땀범벅이라 허벅지 안 피부가 짓물러 고생을 한 훈련병들이 많았다. 통풍이 제대로 될 리 없는 훈련복 상태와 제때 씻고 환기를 시킬 수 없는 여건, 냉방 시설은 꿈도 꿀 수 없는 막사(幕舍) 환경 때문에 피부병이 나을 만하면 도지는 일이 되풀이됐다.
헐어서 진물이 난 사타구니 부위는 가만히 있어도 따갑고 가려운데 훈련복 바지에 쓸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잠결에 자기도 모르게 긁어 상처를 더욱 키우는 일이 잦았다. 훈련병들이 밤낮으로 시달린 피부병은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제풀에 지쳐 비로소 물러갔다.
육군훈련소에서 훈련 중인 훈련병들. ⓒ대한민국 국군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2010 국방 화보 Rep. of Korea, Defense Photo Magazine
#유격훈련과 40km 완전군장(完全軍裝) 행군(行軍)
기초군사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훈련병들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논산에서 유격장이 위치한 전주까지 40여 km를 완전군장으로 행군한 2박 3일 일정의 유격훈련 겸 행군이었다. 유격훈련은 군기(軍紀)도 셌고 훈련도 힘들었다. 희한하게 생긴 지휘봉을 쥐고 있던 육군 중령(中領)이 지휘하는 전주 유격대대 소속 조교들은 눈매가 매서웠고 훈련병들을 다루는 태도는 더 매서웠다.
걸핏하면 얼차려에다 실수할 때마다 발로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그나마 유격훈련 중 최대 난코스라 불리는 외줄타기 도하(渡河) 훈련 때는 훈련병 모두 가슴을 졸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지원자에 한한다는 방침에 다들 한숨을 돌렸다. 짐작건대 안전사고를 우려한 유격대장의 특별 지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격훈련 도중 눈물바다를 이룬 진풍경도 펼쳐졌다. PT 체조 과정에서 마지막 동작에 구호를 붙이지 않는 지시 사항을 어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단체 얼차려를 받던 중 느닷없이 흙탕물이 흥건한 개울 속으로 뛰어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유격 조교는 뒤로 취침 자세에서 어머님 은혜를 합창할 것을 주문했고, 첫 소절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노래 대신 모두 꺼이꺼이 소리 내어 눈물을 훔치고 만 것이다.
집을 떠나 고된 훈련을 받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훈련병들이 서정적이고 구슬픈 가락의 어머님 은혜를 부르는 순간 가족의 소중함과 어머니 품의 그리움이 한꺼번에 떠올라 감정이 복받쳐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마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엄숙한 길목에서 절실하게 다가올 가족애를 환기함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강조할 교육적 목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여겨진다.
유격훈련을 떠나기 전, 중대장은 발바닥 물집이 잡혀 고생하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 훈련병들은 저마다 군용 양말을 뒤집어 꼼꼼하게 겹겹이 비누칠하고 양말 두 켤레를 껴 신는 등 나름의 방책을 세운다고 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40km가 넘는 지난한 행군 거리와 완전군장의 무게가 온몸을 찍어 누르는 압박감에 짓눌려 훈련병들의 발바닥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행군 내내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던 나도 귀대하는 날 훈련소 정문을 5km 남짓 앞두고 결국 물집이 생겼고 부대에 도착했을 때는 피부가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육군훈련소 사격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담배 일발(一發) 장전(裝塡)
빡빡하고 입에서 단내 나는 5주간의 강행군 속에서도 훈련병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다. 10분간 휴식! 인솔자가 외치는 다섯 글자 신호는 훈련병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구원의 소리였다. 담배 일발 장전! 이라는 구호와 함께 빼 문 담배 맛은 세상에 둘도 없는 꿀맛이었다. 훈련병들은 흡연할 때만큼은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고 덕지덕지 쌓인 스트레스도 담배 연기에 실어 날려 보냈다. 훈련병들에게는 군용 담배 은하수(1972년 출시~1988년 단종), 한산도(1974년 출시~1989년 단종)가 무상으로 지급됐다. 한산도보다 덜 독한 맛인 은하수를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시됐던 육군훈련소 내 훈련병들의 흡연 정책은 국민 건강법 제정에 따라 1995년 2월부터 전면 금지됐다. 2022년 1월 흡연권 보장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자 훈련소 내 흡연이 시범 허용됐으나 간접흡연의 피해로 인한 거센 비판에 밀려 두 달도 채우지 못하고 그해 3월 초 중단됐다.
#양념치킨 한 조각과 대민봉사
이런 일도 있었다. 훈련소 생활은 단순하다. 훈련하고 먹고 자는 일의 반복이다. 훈련은 곧 강도 높은 육체노동, 늘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먹는다기보다 욱여넣기에 바빴던 식사 시간. 쉰내 나는 짬밥은 먹고 나면 금방 배가 꺼졌다. 어느 날 자유 시간에 꾀를 냈다. PX에 잠입해 운 좋게 닭다리 양념치킨 한 조각을 살 수 있었다. 누가 볼 새라 몰래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나만의 별식을 즐기며 희희낙락할 줄은 나도 몰랐다. 배가 고프면 별짓을 다 하게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소식(小食)에 식탐(食貪)과는 거리가 멀던 내가 그랬으니 다른 훈련병들은 오죽했을까.
집밥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즈음, 하늘이 도우사 사제(私製) 밥을 먹을 기회도 있었다. 이른바 가을걷이 대민봉사(對民奉仕). 훈련소 생활 막바지에 인근의 한 마을로 출동한 우리 소대원들은 서투르나마 열심히 추수(秋收)를 거들었다. 대민봉사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쌀밥에 배추겉절이와 나물 반찬 몇 가지가 놓인 상차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소대원들은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었다.
#이○○ 부사관(副士官)에 대한 기억
5주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내무반장에 대한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소대 내무반장은 하사(下士) 계급을 단 이○○ 부사관(副士官)이었다. 나이가 기껏해야 또래 거나 오히려 한두 살 어려 보였다. 정황상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 군인이 됐을 것이 분명할진대 대학 재학 중이거나 졸업생들로 구성된 훈련병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했을 법했는데도 의외로 속정이 깊었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거친 말투에서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과 달리 뒤끝이 없고 마음 씀씀이가 따뜻했다.
전주 유격장에서의 마지막 날 밤, 이○○ 부사관은 일석점호(日夕點呼) 후 침상에 누워 취침 준비 중이던 우리 소대 훈련병들에게 군용 수통에 가득 채운 막소주 한 모금씩을 돌리는 파격적인 후의를 베풀었다. 훈련소 입소 후 달포를 훌쩍 넘겨 처음 맛본 술이라 웬만하면 천상(天上)의 맛일 법도 했건만 도둑고양이 생선 훔쳐먹듯 몰래 홀짝일 수밖에 없었던 어색한 분위기에다 안주도 없이 삼킨 강소주인 탓에 술맛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 소대원들은 어젯밤의 몰래 음주를 유격대 당직 사관이 눈치채는 바람에 이○○ 부사관이 혼쭐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다들 속만 태웠다.
유격훈련장의 PT 체조 장면. ⓒ임영식 • 대한민국 국군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 부사관은 카투사 교육대로 떠나기 전날 밤, 중대장의 허락하에 우리 소대원들에게 회식을 베풀어 주기도 했는데 그때는 소주 맛을 제대로 맛봤고, 알딸딸한 술기운에 취하고 흥에 취한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하다.
논산역에서 카투사 교육대로 가기 위한 평택행 군용 열차를 타던 늦은 밤, 이○○ 부사관은 객실에서 소대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무탈한 군 생활을 바라 마지않았다. 우리 소대원들과 연배가 비슷해 벌써 오래전에 전역(轉役)했을 이○○ 부사관의 건투를 빈다.
엄중한 시대였던 1985년, 말로만 듣던 체벌(體罰)을 논산 훈련소에서 목격한 적은 한두 차례였고 군기 확립 차원에서 저강도의 얼차려만 경험했을 뿐이었다. 훈련소에서 겪지 않았던 체벌이 정작 자대 배치 후 카투사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졌던 걸 보면 악습의 아이러니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엉뚱하게 기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입소식과 수료식을 공개 행사로 치르고 수료식 후 가족과의 외출도 허용된다고 하니 군대가 변해도 많이 변했다. 훈련병 가족 면회는 시대 상황에 따라 폐지와 부활을 반복했다. 1951년 한국전쟁 도중 훈련병들의 사기 진작(振作)을 목적으로 도입된 면회제도는 1959년 폐지(과소비 유발)~1988년 부활(경제 수준 향상)~1998년 폐지(입대 100일 휴가제 도입)~2011년 부활(사회적 변화)~2020년 2월 중단(코로나19)을 거듭하다 2022년 6월 29일부터 다시 허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