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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일기

5. 카투사 교육대(KTA, KATUSA Training Academy)

by 박인권

5. 카투사 교육대(KTA, KATUSA Training Academy)


#평택행 군용 열차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군용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끌벅적하던 객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방금까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거드름을 피우던 훈련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일제히 입을 닫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열차의 차창 밖으로 떠밀리듯 지나가는 칠흑 같은 어둠의 형체를 보는 순간, 훈련병들은 불과 몇 시간 후면 맞닥뜨릴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기대 반 두려움 반에 침묵했을 것이다.


훈련병들을 실은 군용 열차는 가을 이슬이 낮게 깔린 이른 새벽, 평택역에 도착했다. 대기 중인 군용 버스에 올라탄 훈련병들이 캠프 험프리스 정문을 지나 카투사 교육대 연병장 앞에 내리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이국적인 건물들이 사방을 둘러쌌고 정체불명의 기운이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연병장을 휘감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 이곳저곳에 세워진 영어 표지판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KTA(KATUSA Training Academy)의 전신(前身)인 KRTC(KATUSA Reception Training Center)라는 카투사 교육대의 영어 명칭 머리글자를 보면서 훈련병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장소를 실감하게 됐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미군 교관(敎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카투사 교관들도 여럿 보였다.


#at ease 해프닝

오(伍)와 열(列)을 맞춰 연병장에 집합한 훈련병들은 잔뜩 얼어 있었고 10월의 새벽 찬 공기에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선임(先任)으로 보이는 미군 교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at ease!”(쉬어!)

제식훈련(制式訓鍊) 영어 구호를 알 리 없는 카투사 훈련병들은 당황한 가운데 서로 눈치를 보며 멈칫거렸다. 미군 교관이 한 번 더 “at ease!”라고 고함을 치자 몇몇 훈련병들이 발음이 비슷한 군복 상의(上衣) 에리를 만지작거렸고 다른 훈련병들도 얼떨결에 따라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투사 교관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중 한 명이 “야, 쉬어 몰라, 쉬어!”하고 큰소리로 다그쳤다. 카투사 교관의 말에 따라 우리는 황급히 ‘쉬어’ 자세를 취했지만 ‘at ease’의 실체를 알기까지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2018년 초 카투사 교육대는 의정부 캠프 잭슨 시대를 마감하고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했다. 경기도 평택에 세워진 캠프 험프리스 내부. ⓒUSAG-Humphreys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기상(起床) 구호에 맞춰 일어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PT(Physical Training) 체조였다. 어둑어둑한 연병장에서 교관들의 지도에 따라 시작된 미군 도수체조(徒手體操)는 강도가 셌고 윗몸일으키기(sit-up)의 부담이 커 체조라기보다는 체력 훈련에 가까웠다. 정해진 횟수에 도달한 훈련병보다 그렇지 못한 훈련병이 훨씬 많았고 그럴수록 채근하는 카투사 교관의 목소리도 커졌다. 윗몸일으키기의 기준선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 50개 언저리였던 것 같다. 훈련 3주 차 때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2마일 달리기 세 종목에 걸쳐 PT 테스트를 했다. 지금은 2분에 팔굽혀펴기 42개, 윗몸일으키기 53개, 2마일 달리기 15분 54초 이내 주파가 합격선이라고 한다.


카투사 교육대의 생활은 논산 훈련소와는 영 딴판이었다. 훈련은 물론 먹고 입고 자는 일상생활까지 모든 것이 미군들과 똑같은 방식대로 영어로 진행됐다. 카투사 교육대의 풍경과 분위기에서 이곳이 한국 땅 위에 지어진 군부대가 맞는가 싶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캠프 험프리스의 담장 밖은 한국, 담장 안은 미국이었다.


#생경한 카투사 교육대 생활

군복과 전투화, 생필품 등 미군 부대 복무에 필요한 각종 보급품 수령이 끝난 다음 날부터 훈련이 시작됐다. 3주간의 훈련 내용은 ▲군사용어, ▲독도법, ▲제식훈련, ▲체력 검정, ▲정훈교육, ▲개인화기, ▲구급법, ▲무선통신, ▲생활 규정 교육 등이었다. 영어 능력 시험도 두 번 치렀다. 모든 수업이 영어로 이루어져 생뚱맞고 어색했으나 각자 눈치껏 알아들은 척했고, 5주간의 기초군사훈련에 단련된 몸이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었다. 훈련 도중 규율에 어긋난 행동이 발각되면 벌칙으로 팔굽혀펴기 10~20회를 감수해야 했다. 소정의 교육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수료가 미뤄지는 유급(Holdover) 제도가 있었으나 실제로 유급당한 훈련병은 없었다.


논산 훈련소 때와 마찬가지로 순번을 매겨 불침번(Fire Guard)을 섰으나 설거지할 필요가 없었고 숙소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비치돼 있어 손빨래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내무반(內務班, barracks)이 이층침대가 놓인 여러 개의 방으로 된 기숙사 형태라 위 침대를 배당받은 카투사 훈련병들은 자다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삼시 세끼가 양식(洋食)으로 제공되는 미군 부대의 음식 문화는 카투사 훈련병들에게 생경한 경험이었다. 1980년대에 양식은 접하기 쉽지 않은 음식이었다. 카투사 훈련병들은 양식과 빵, 샐러드, 우유와 주스 따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처음에는 다들 좋아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에 입맛을 잃었다. 한국 음식이 당길 수밖에 없는 카투사 훈련병들의 음식 취향은 자대(自隊)에서 더욱 짙게 드러났다.


PT 도중 윗몸일으키기를 하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미군들. ⓒSpc. Eric Liess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홍수환의 모친이 운영한 캠프 험프리스의 카투사 스낵바

카투사 교육대 생활을 되짚는 동안 몇 가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1주 차 훈련이 끝난 휴일 자유 시간을 이용해 훈련병 여럿이 캠프 험프리스 내 카투사 스낵바를 찾았다. 카투사 스낵바는 민간인이 운영하는 미군 부대 내 한국 식당이다. 카투사나 카투사 훈련병들에게는 식비가 면제되는 미군 부대 식당과 달리 스낵바에서는 돈을 내고 음식을 사 먹어야 한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모여 앉은 훈련병들의 눈길이 일제히 스낵바 한쪽 벽면으로 쏠렸다. 그곳에 걸린 여러 장의 사진 속에서 국민 모두 다 아는 낯익은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남자의 옆으로 스낵바 주인아주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사진 속 남자는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1950~), 스낵바 주인아주머니는 홍수환의 모친인 황농선 여사(1921~1994)였다. 걸쭉한 신의주 사투리가 인상적인 홍수환의 모친은 1974년 7월 3일 전 국민에게 각인된 명언을 남겼다.


이날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프로복싱 WBA 밴텀급 세계 타이틀전에서 홍수환은 홈 링의 챔피언 아널드 테일러(1945~1981)를 네 차례나 다운시키고 15라운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챔피언벨트를 차지했다. 경기 직후 홍수환과 연결된 국제전화 수화기 너머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아들의 말에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맞장구친 모자(母子)의 대화는 지금까지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라디오로 위성 중계한 이날 경기 상황을 교실에서 귀에 리시버를 꽂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1차 방어에 실패한 테일러는 1981년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홍수환은 한국시간으로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 시티 뉴파나마체육관에서 펼쳐진 신설된 WBA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결정전에서 홈 링의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맞아 2회 네 번이나 다운당하고도 3회 역전 KO승을 거두는 기적 같은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지금은 없어진 TBC(동양 방송)가 위성 중계한 이날 경기 2회가 끝나자, 안방에서 시청 중이던 성질 급한 국민은 홧김에 TV를 꺼버리고 나가는 바람에 불과 2분 뒤에 펼쳐진 명장면을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스낵바에서 본 홍수환의 모친은 입담이 좋았다. 직접 만나본 홍수환도 달변(達辯)이다. 생김새도 어머니를 닮았고 말솜씨도 어머니를 닮았다. 홍수환이 활동하던 1970년대 프로복싱은 대한민국의 국민 스포츠였고 그 인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스낵바에서 만난 동향의 대학 친구

카투사 교육대 훈련이 끝날 즈음 수소문 끝에 동향(同鄕)의 대학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보다 1년여 먼저 카투사로 입대했고 캠프 험프리스의 모 부대에서 복무 중이었다. 카투사 스낵바에서 만난 친구의 군복 상의에 달린 상병 계급장이 하늘처럼 높아 보였다. 친구는 카투사 선배로서 군 생활에 도움이 될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형 인간인 내가 카투사 교육대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다. 요즘의 기상 시간은 새벽 4시라고 한다. 아들이 들려준 바로는 과거보다 카투사 교육대 군기(軍紀)도 세졌다고 한다.


수료식이 끝나자, 훈련병들이 근무할 자대가 개별 통보됐고 군사 주특기(MOS, Military Occupational Specialty)도 정해졌다. 내가 근무할 부대는 동두천 미 제2보병 사단(2nd Infantry Division) 자재관리 중대, 주특기는 행정병. 이때까지만 해도 자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카투사 교육대는 캠프 험프리스(평택) 시대와 캠프 잭슨(의정부) 시대를 거쳐 2018년 초부터 다시 캠프 험프리스 시대가 됐다. 교육대의 영어 명칭도 KRTC(KATUSA Reception Training Center)에서 KTA(KATUSA Training Academy)로 변경됐다. 군사훈련소 개념에서 전문성과 교육성을 강조한 군사훈련 학교로 바뀐 셈이다. 다음 날 또 다른 낯선 땅, 동두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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