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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일기

6. 자대 배치와 전입 신고식

by 박인권

6. 자대 배치와 전입 신고식


#동두천행 군용 버스

평택행 군용 열차 안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3주간 훈련받을 카투사 교육대와 2년여 복무할 자대(自隊)의 무게감은 달랐다. 군용 버스에 몸을 실은 카투사 신병(新兵)들은 시종일관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예측불허의 자대 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신병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신병들의 초조한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용 버스는 뻥 뚫린 도로를 막힘없이 내달렸다. 군용 버스는 마침내 동두천 시내를 통과해 미 제2보병사단 정문 앞에 멈췄다. 늦가을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신병들은 각자 근무할 캠프별로 흩어졌다.


신병 인수를 맡은 선임병(先任兵)이 내 이름을 불렀다. 캠프 케이시 자재관리 중대에 배치된 카투사 신병은 나 혼자라 저절로 군기(軍紀)가 바짝 들었다. 내 위 선임병의 바로 위인 선임병은 인상이 수더분했다. 정문을 통과하자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가 뻥 뚫려 있었다. 카투사 교육대에서 본 이국적인 건물들이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있었고, 군복 차림의 미군들이 여럿 보였다. 부대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영내(營內)를 운행하는 버스가 따로 있고 정문을 출발해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기까지 1시간 30여 분이 걸린다고 선임병이 말했다. 당시 동두천 2사단 내에는 캠프 케이시와 캠프 호비, 캠프 캐슬 등 3개 캠프가 주둔하고 있었다. 캠프 캐슬은 2013년 철거됐다.


경직된 자세로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안쓰러웠던지 선임병은 걸어가는 내내 시시콜콜한 말을 걸어왔다. 자대 배치 첫날 본 선임병의 첫인상은 선임병이 제대할 때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병 계급장을 단 선임병은 친절하고 자상했다.


#사단 카투사 축구대회

정문에서 10여 분 걸어가자, 왼쪽으로 짙은 갈색 건물 여러 채가 나타났다. 자재관리 중대 막사(Barracks, 생활관)였다. 건물 내에 카투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사복 차림의 미군만 서성일 뿐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곧장 군용 지프차에 올라타고 사단 연병장으로 출발했다. 운전병은 내 바로 위 선임이었다. 나를 인솔한 선임병과 달리 호리호리한 외모에 눈매가 매서워 깐깐한 인상이었다.


연병장에서는 연례행사인 사단 카투사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연병장에 깔린 푸르른 천연 잔디가 조명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연병장 스탠드석에서 응원에 한창인 중대 카투사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논산훈련소에서 하던 대로 ‘충성’ 구호를 붙였으나 바로 위 선임병이 ‘단결’이라고 바로잡아 주었다.


스탠드석에는 군복 차림의 카투사와 사복 차림의 카투사가 섞여 있었다. 좌장(座長)으로 보이는 카투사 병장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는데 말투와 표정, 몸짓으로 보아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질타인 듯했다. 그가 갑자기 공찰 줄 아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오늘 온 신병, 교체 선수로 투입해”라고 외쳤으나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나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경기에서 진 우리 중대는 예선 탈락했다.


#전입 신고식 예행연습

중대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빗장 속에 드리워진 냉기(冷氣)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대에 갓 배치된 신병의 막막한 신세를 절감할 수 있는 숨 막히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름하여 ‘전입 신고식 예행연습.’ 바로 위 선임병과 함께 불려 간 막사 내 한 카투사의 방(房)에는 신병을 보러 온 중대 선임들이 모여 있었다. 의자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는 나에게 선임들은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출신 대학은?”

“전공은?”

“고향은?”

“취미는?”

“특기는?”

“애창곡은?”

……


몇몇 선임이 대학 졸업 후 입대한 내가 못마땅하다는 듯,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딴지를 걸었다. 나의 대답과 상관없이 스무고개처럼 계속된 선임들의 궁금증이 나에게는 문초(問招)처럼 다가왔다. 히터 장치가 작동된 방 안은 더웠고 진땀이 흘러내렸다. 눈을 깜빡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눈은 깜빡거렸고, 그럴 때마다 선임들이 대놓고 구시렁거렸다. 눈에 힘을 주고 억지로 버티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고 그런 동작이 몇 번 반복되자 눈이 따가워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바로 위 선임은 인상대로 까칠했다. 나보다 두 살 적은 그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군기를 다잡았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후임(後任)이 껄끄럽기도 하고, 그것이 빌미가 돼 훗날 행여라도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우려를 미연(未然)에 방지할 의도였을 것이다. 신고식 전까지 밤마다 선임 병장 또는 또 다른 병장의 방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군기반장을 자처한 병장은 술을 마시다 말고 느닷없이 얼차려를 시켰다.


얼차려의 단골 메뉴는 원산폭격. 방바닥에 깔린 카펫의 쿠션이 정수리로 쏠린 몸무게의 충격을 누그러뜨리는 것에 안심할 찰나, 전진과 후퇴 동작을 이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오히려 푹신한 카펫이 말리면서 걸림돌이 돼 직진과 후진에 방해가 되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졌다. 원산폭격 상태에서 직진도 힘들었지만, 후퇴는 더 힘들어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얼차려 전에는 꼭 커튼을 쳤는데 창밖으로 방안 풍경이 새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는 미군이 얼차려 모습을 목격한다면 문제의 소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들에게 얼차려와 체벌은 허용되지 않았다.


#운 좋게 넘어간 신고식

며칠 후 초저녁 카투사들이 사용하는 중대 다용도실에서 전입 신고식이 펼쳐졌다. 빳빳하게 군복을 다려 입은 중대 카투사 전원이 두 줄 종대(縱隊)로 도열(堵列)했다. 줄의 순서는 계급순이었다. 선임 병장이 주관하는 신고식은 신병이 헤쳐가야 할 향후 자대 생활의 향방을 좌우하는 관문(關門)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라 이를 악물고 정신 줄을 다잡았다.


예행연습 때 바로 위 선임한테 숱한 잔소리를 들으며 몸으로 익힌 신고식 내용을 앵무새처럼 목청껏 뱉어냈다.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고 나가버린 선임 병장의 퇴장을 신호로 신고식은 짧고 조용하게 끝났다. 바로 위 선임은 전에 없이 무탈하게 신고식을 치른 데에는 내가 잘해서라기보다 오늘 전역 일자가 정해진 선임 병장의 들뜬 심리 상태가 큰 몫을 했다고 귀띔했다. 선임들이 눈물이 날 정도로 혹독한 전입 신고식을 눈물의 파티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이날 알았다.


이날 밤, 카투사 생활관에서는 질펀한 소맥(소주+맥주) 술판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ETS(Expiration Terms of Service, 만기 제대) 명령이 떨어진 선임 병장의 행복 바이러스 덕분에 별 탈 없이 신고식의 고비를 넘어섰으나 10여 일 후 선임 병장의 눈 밖에 난 나로 인해 중대 전체 집합이 걸리는 사달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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