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첫 외박과 단체미팅 해프닝
7. 첫 외박과 단체미팅 해프닝
#첫 외박의 설렘
동두천의 겨울은 일찍 찾아왔다. 11월 초순인데도 밤기운이 매섭고 차가웠다. 전입 신고식이 끝나고 이틀째 되던 날,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논산훈련소 입소 후 거의 석 달 만의 첫 외박. 외박 기간은 3박 4일, 내일이면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 달뜬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외박 전날 밤, 바로 위 선임이 손수 군복을 다려주었다. 중대 카투사들의 오래된 관행이라고 한다. 관행은 또 있었다. 선임은 귀대 시 중대 카투사들이 나눠 먹을 시루떡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관행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 긴급 호출을 받았다. 전역일이 임박한 중대 최고참(最古參) 카투사는 얼큰히 취해 있었다. 술 한잔을 따라준 그는 다짜고짜 노래를 시켰다. 얼떨결에 남성 2인조 그룹 해바라기의 ‘모두가 사랑이에요’를 불렀는데 헤어진 첫사랑이 생각난다며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만취한 그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에게 신병의 통과의례라며 단체미팅을 주선하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단체미팅의 디데이(D-데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외박에서 돌아온 뒤 일정을 잡아볼 요량으로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부대를 떠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귀대 후 벌어질 일을 까맣게 몰랐다.
#해병대 병장과 마른오징어
외박이 끝나는 날 아침, 전날 동네 방앗간에서 찐 시루떡 더미를 싼 보자기와 사복(私服) 보따리를 들고 통일호 열차 군용 칸에 올라탔다. 군인들에게 운임이 무료인 군용 칸은 좌석제가 아니라 빈자리에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였다. 먼발치 통로 쪽으로 빈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옆자리에는 해병대 병장이 앉아 마른오징어를 안주 삼아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팔각모에 달린 병장 계급장이 우러러보였다. 존댓말로 술을 권했으나 사양한 대신 그가 손으로 찢은 오징어 몸통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이등병인 나를 힐끔 본 그는 아마 자신의 신병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혼잣말했을 것이다.
“에구, 고생 좀 하겠구먼.”
강하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보아 부산 사람이 분명할진대 물어보지는 않았다. 해병대 병장은 맥주 한 모금을 털어 넣으면서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었다.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두천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수유리에서 내려 동두천행 시외버스로 갈아탄 나는 오후 4시쯤 아무도 없는 중대 막사에 도착했다. 한 시간 조금 지나 카투사 선임들이 하나둘 막사에 나타났고 바로 위 선임에게 시루떡 보자기를 건넸다.
방에 있던 나에게 밤 9시쯤 최고참 병장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첫 외박 전날 밤 노래를 시킨 선임의 방으로 갔다. 카투사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경례를 마치자마자 최고참 병장은 배시시 웃으며 짧게 말을 내뱉었다.
“단체미팅 날짜 잡았지?”
“……”
#최고참(最古參) 병장의 막가파식 화풀이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자, 안색이 싹 바뀐 최고참 병장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육두문자 세례와 함께 왼쪽 뺨에서 불꽃이 튀었다. 단체미팅 디데이에 대한 명시적인 언질이 없어 상식선에서 해석한 것을 최고참 병장은 지시 불이행으로 오해했고, 그 점을 어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원산폭격 얼차려에 시달려야 했다.
무임승차(無賃乘車)나 다름없는 평화로운 전입 신고식을 치른 대가라 치부하기에는 억울하고 속상했다. 열여덟 명이나 되는 중대 카투사의 파트너를 사나흘 만에, 그것도 첫 외박 중에 섭외한다는 것을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단체미팅은 선임 병장 소관이라 최고참 병장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병의 단체미팅 주선 관행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던 때라 내키지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종로 2가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진 단체미팅 며칠 전, 최고참 병장은 제대하고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병 때였다. 제대한 모 병장을 서울에서 만났다.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 병장이 장난삼아 과거 자신의 선임이던 최고참 병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바꿔주었다. L그룹에 다니던 최고참 병장은 내가 누구인지 짐짓 모른 채, 존댓말을 썼다. 나를 모른다는 그는 분명 그날 나에게 가한 체벌과 얼차려를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신병에게 부당한 짐을 강요하는 고약한 병폐인 단체미팅 주선 관행은 내가 병장이 될 무렵에서야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