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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30. 장례식장(葬禮式場)을 다녀와서

by 박인권

30. 장례식장(葬禮式場)을 다녀와서

장례식장의 풍경은 비장하다. 영정 사진 속 죽은 자는 죽은 몸이라 말을 할 수 없으나 웃고 있고, 산 자는 산 몸이라 할 말이 많으나, 침묵 속에서 슬퍼할 뿐이다. 죽은 자가 죽은 날은 죽은 자의 마지막 날이자 죽은 자의 최후의 오늘이나, 산 자의 오늘은 산 자의 내일이 될 수도 있고 1년 후의 내일이 될 수도, 10년 후의 내일이 될 수도 있으니 산 자의 마지막 날과 최후의 오늘은 산 자도 모른다.


지난주 두 번이나 문상(問喪) 갈 일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무런 인연이 있을 리 없는 두 고인(故人)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한 분은 90세에, 다른 한 분은 68세에 망자(亡者)가 된 걸 보면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태어나는 날은 알아도 가는 날은 알 수 없다는 말도 그런 뜻일 것이다.

고인의 나이 90이라면 호상(好喪)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건만, 부모를 여읜 상주(喪主)로서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 또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돌아가신 상주의 아버지는 4~5년 전부터 신장 투석(透析)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高齡)의 환자에게 1주일에 두세 차례씩 한 번에 4시간 이상 소요되는 투석 치료는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치료를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다행히 고인의 배우자이자 상주의 어머니가 고인의 곁을 지키며 끝까지 가는 길을 함께 했다니 노부부(老夫婦)의 연분(緣分)은 백년해로(百年偕老)로 이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장 상주 명단(상제, 喪制)에 고(故) 자가 붙은 이름이 보여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던 끝에 입을 떼고 말았는데 막상 상주의 여동생이란 말을 듣고 보니 괜히 입방정을 뜬 것 같아 미안했다. 두 고인의 명복(冥福)을 빈다.


두 번째 조문한 상주도 부친상(父親喪)을 당했다. 고인의 나이로 보아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는데 역시 그랬다. 고인은 췌장암에 맞서 5년을 투병한 끝에 하늘나라로 갔다. 투병 중에 태어난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삶의 의지를 다졌다는 말에 새삼 피붙이의 정(情)을 생각게 한다. 고인의 외아들인 상주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결혼했는데 부친의 췌장암이 발견된 시기와 엇비슷해 가슴앓이로 고생했을 가족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췌장암은 암 중에서 생존율이 가장 낮다. 초기인 1기에 암이 발견되더라도 5년 평균 생존율이 40% 수준이라 다른 암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전이성(轉移性)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장례식은 첫째 날 시신 안치와 빈소(殯所) 설치, 둘째 날 입관(入棺)에 이어 마지막 날 발인(發靷)으로 이어지는 삼일장(三日葬)이 일반적인 추세이지만 가끔 사일장(四日葬)도 볼 수 있다. 사일장은 대개 부족한 장제장(葬祭場)이 원인이다. 문상(問喪)한 두 경우 중 하나가 그랬고 다른 하나의 발인 시간도 장제장 사정 때문에 오후 3시로 늦춰졌다고 한다.


장제장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장례 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가족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비싼 장례식장의 대여비를 생각하면 사회적 비용의 낭비인 것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매장(埋葬) 풍습이 화장(火葬)으로 대체 중인 가운데 자연 친화적인 수목장(樹木葬)이 새로운 장례문화로 떠오르고 있다. 고인을 모시는 방식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상객들은 영정(影幀) 속 사진을 보면서 잠시나마 죽음을 화두(話頭)로 생각에 잠길 것이다. 알베르 카뮈(1913~1960)는 행복한 죽음이란 표현을 썼다. 행복한 죽음의 비결은 마음의 평화에 있다는데,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 할 명제다. 행복한 죽음은 카뮈가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71년에 출간된 소설의 제목이다. 카뮈는 47살 때 자동차 사고로 요절(夭折)했다.


영국 작가 짐 크레이스(1946~)는 1999년 미스터리에 가려진 죽음 이후의 세계를 파헤친 장편소설 ‘그리고 죽음’을 펴냈다. 크레이스는 ‘사람은 살기 시작하는 순간, 죽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운명공동체이며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리고 죽음’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됐다(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2, 2006, 2009).


땅을 딛고 마음먹은 대로 걷는 행위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위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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