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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일기

10. 방장(房長)과의 악연(惡緣)

by 박인권

10. 방장(房長)과의 악연(惡緣)


내 룸메이트인 방장(房長)은 특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의 모 구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 입대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계급은 상병이나 중대 카투사 중 나이가 제일 많았고 후임병(後任兵)들에게 엄했다. 가뜩이나 중대 카투사 열여덟 명 중 말단(末端) 신병이라 군기가 바짝 든 나는 방 안에만 들어오면 저절로 방장의 눈치를 살피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방장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쓰는 시간이 많았다. 방 안에서 펼쳐지는 그의 일상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나의 심정은 행여 비위를 거스를까 조마조마했다. 좀처럼 웃지 않는 그가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미간(眉間)에 주름이 뚜렷하게 잡혔고 화를 낼 때면 짙은 눈썹이 위로 치올라 쳐다보기가 두려웠다. 아주 가끔 무슨 이유에서인지 웃는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이내 표정이 굳어지곤 했다.


말수가 적은 대신 까칠했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술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단체 회식 때 말고는 동료 카투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외출과 외박을 나갈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방졸(房卒)인 내가 아주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방장은 한 번씩 자고 있던 나를 새벽에 깨웠다. 새벽까지 자지 않고 있던 그는 잠이 덜 깬 나에게 갑자기 일장(一場) 훈계(訓戒)를 하다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얼차려를 시켰다. 졸병이 졸병답지 않고, 방졸로서 태도가 불량하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그의 지적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추상적이라 황당할 뿐이었다. 새벽 시간대에 터무니없는 일을 당한 나는 도무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반발심이 치밀었으나 내색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내색할 수 없었다.


동료 카투사들도 방장을 달가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후임(後任)들에게도 과민반응을 보였다. 뻔한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소한 것을 침소봉대하는 일이 많아 후배 카투사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방장 앞에서 후임들은 말을 아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밤 9시경 외박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고서 깜짝 놀랐다. 방장의 후임 전원이 군복 차림으로 집합해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집합 사유는 후임들의 잦은 외박과 생활 태도 불량.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임 병장의 소관인 외박까지 간섭하는 그의 부당한 행위는 분명 월권(越權)이었다. 그럼에도 다들 속으로만 불만을 삼긴 채 어떤 항변도 하지 않았다. 계급에서 비롯된 군부대 특유의 위계질서의 압박감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항변 의지를 스스로 거둬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 속에서 이건 아니다 싶어 꾀를 냈다. 단체로 얼차려를 받던 중 내가 풀썩 쓰러지며 혼절한 것처럼 시늉한 것이다. 그날 집합은 그것으로 끝났고 방장도 외박을 구실로 더 이상 후임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상병 승진을 앞둔 내가 다른 방의 방장이 되면서 비로소 방장과의 악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방장의 뒤틀린 심사(心思)는 그가 말년 병장 시절, 또 한 번 기이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장은 우리가 다 보는 앞에서 선임 병장을 구타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광경에 다들 경악했다. 전역(轉役)이 초읽기에 들어간 갈참이 카투사 중대원들의 내무반장 격인 선임 병장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본 우리는 모두 흥분했다. 선임 병장과 방장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으나 몇몇 병장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다행히 사태는 일단락됐다. 선임 병장은 천성(天性)이 착하고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품이 조금만 거칠게 도드라졌더라면 그날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상병 때 선임 병장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오래전에 없어진 영등포 쪽방촌이었다. 스스럼없이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한 그는 신촌의 명문 사립대 공대를 다니다 입대했다. 선임 병장은 말년 병장이 느닷없이 후배 카투사들을 죄다 불러 모아 체벌을 가하는 현장을 목격하고서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스스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을 말년 병장은 86 서울 아시안게임이 끝날 무렵 소리 소문도 없이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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