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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일기

9. 영외(營外) 근무지

by 박인권

9. 영외(營外) 근무지


#사수(射手)의 클리어링

특이하게도 나는 사수(射手)로부터 업무에 관한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사수는 클리어링(clearing, 장비 반납 등 전역 준비 기간) 중이었다. 사수는 막사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음 날 또 사라져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나에게 “팀장이 시키는 대로 영문 타자만 열심히 치면 된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제대를 앞둔 카투사들은 전역(轉役)에 앞서 규정보다 긴 클리어링을 갖는 것이 관례였다. 클리어링 기간에는 근무가 면제된다. 규정을 어긴 것이라 적발되면 경칠 일이지만 카투사들의 인사권이 한국군 지원단 인사과 소관이라 근태관리에 허술한 제도적 맹점에서 비롯된 폐단이었다.


카투사들의 클리어링에 대해 동료 미군들은 관심 밖이었고, 카투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인사과에서도 카투사들의 출퇴근 현황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의 주시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카투사들의 복무 및 영내 생활에 대한 근태 감독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작동돼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진 결과일 것이다. 당시에도 부대 상황에 따라 클리어링 기간의 엄수(嚴守)가 당연한 곳이 많았고, 보직의 특성상 편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던 곳도 많았다. 아무래도 단위 부대의 근무 환경과 중대 카투사들의 막사 생활 풍토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사수의 눈두덩 멍의 실상

사수가 전역을 앞둔 며칠 전 밤,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다. 사수의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사수는 술 먹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졌다고 했다. 중대 선임들이 수군댔다. 눈두덩 멍의 실상이 밝혀졌다. 하루 전 사수는 병장 몇몇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는 사수와 같은 날 전역하는 또 다른 말년 병장도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사수와 말년 병장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고 급기야 치고받는 싸움으로 확전 됐다. 동석한 병장들이 말릴 새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빠른 말년 병장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사수의 안면을 강타했다고 한다. 술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한 사수는 체질상 술을 마시지 못해 멀쩡한 말년 병장과의 주먹다짐에서 헛손질만 남발한 채 모양만 구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수의 눈자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멍이 그날의 승부를 말해주었다.


선임들에 따르면 사수와 말년 병장은 초년병(初年兵) 때부터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3개월 먼저 입대한 사수는 바로 아래 졸병인 말년 병장을 시도 때도 없이 갈궜고 둘 사이에 곪아 터진 마음의 상처가 끝내 볼썽사납게 폭발한 것이라고 선임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교련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사수는 3개월 복무 단축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말년 병장과 한날한시에 제대했는데 전역식 현장에서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못 본 채, 했을 것이다.


#미군 팀원들과의 첫 만남

나는 근무지가 영외(營外)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사단의 자재관리 출납을 관장하는 중대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중대원들 모두 비품으로 지급된 출퇴근용 자전거를 갖고 있었다. 자전거가 손상돼 반납하면 새 자전거가 지급됐고 부대 밖으로 타고 나갈 수도 있어 여러모로 유용했다. 자재관리 중대원만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카투사들에게 자전거는 아주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동두천 시내는 물론 가을 단풍의 명소인 인근의 소요산(逍遙山)에 갈 때면 자전거만큼 효율적인 이동 수단도 없었다. 주말이나 연휴 때는 멀리 연천까지 자전거 하이킹을 다녀오는 카투사들도 많았다.


영외 근무지는 미 제2보병 사단 정문 건너 오른편으로 300~400m 떨어진 곳에 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초미니 캠프 형태로 지어진 근무지는 아담했고 내부에 커피와 콜라, 핫도그, 샌드위치 따위를 파는 테이크아웃 전용 민간 점포가 한군데 있었는데 인기가 많았다. 나는 주로 커피를 사서 사무실에서 마셨는데 1리터짜리 X-Large 커피를 이때 처음 보았다.


사무실에 카투사는 나 혼자였다. 팀장 격인 중사(SFC, Sergeant First Class)와 하사(SSG, Staff Sergeant), 병장(Sergeant)과 상병(Corporal)이 한 명씩 있었고 백인인 상병 빼고 나머지는 모두 흑인이었다. 한국 근무 3년째라는 중사는 과묵한 일벌레였고 팔척장신인 하사는 자상하면서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분위기 메이커라 사무실 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병장은 팀 내 유일한 여군으로 똑소리 나게 일을 잘했고 내 또래인 상병은 붙임성이 좋고 쾌활해 나하고 죽이 잘 맞았다.


#여군무원(女軍務員)의 오해

부대원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군무원(軍務員) 두 명이 별도의 사무실에서 하루걸러 교대로 근무했다. 군무원들은 고졸 학력의 20대 중후반의 한국 여성이었고 그들은 타이핑된 문서를 토대로 광학문자(光學文字) 판독 작업을 했다. 군무원들의 방에는 대형 광학문자 판독기가 설치돼 있었다.


군무원 중 한 명을 우연히 동두천 시내의 한 레스토랑에서 본 적이 있었다. 동료 카투사와 일과 후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눈이 마주쳐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민망하게도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미군 부사관이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걸로 보아 우리 중대원은 아니었다. 이틀 후 출근길에서 만난 그녀는 평소와 달리 계면쩍게 고개만 까닥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혹여 내가 자신의 처신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까 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굳이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만, 그녀의 그런 태도는 한동안 계속됐다.


우리 팀은 사단의 무기와 장비, 비품 출납(出納)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다. 영어 타자기를 본 적은 있어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적응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듣도 보도 못한 무기와 장비의 영어 명칭과 수량을 더듬거리며 독수리 타법으로 치느라 속도가 느리고 굼떴으나 한 달쯤 지나자 제법 손에 익었다. 팀장이 빠르게 업무를 파악하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상병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생소한 생활 영어의 충격

사무실에 출근한 첫날을 잊을 수 없다. 팀원들이 영어로 나누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난감했다. 짧은 문장으로 말을 걸어왔으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쩔쩔맸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군들은 문어체(文語體)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생활 영어는 1970~80년대의 교과서 영어와는 딴판이었다. 간단한 인사말부터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달라 생소했다.


아침에 출근한 나에게 그들은 “Good Morning”이라는 말 대신 “Hi(Park)” “Hi, (how are you) doing?”이라고 했고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에는 “What’s up?”(별일 없지, 잘 지냈어)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짓고 눈치껏 알아듣는 척했고 그들은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때도 상병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일부러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때로는 몸짓으로 때로는 의성어를 섞어가며 나의 이해를 도왔다. 한 달이 지나자 아주 조금씩 말문이 트이고 살짝살짝 귀가 열리는 조짐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미군 상병은 고마운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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