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D-FAC의 전신(前身) Mess Hall
12. D-FAC(Dining Facility)의 전신(前身) 메스 홀(Mess Hall)
#지겹도록 먹은 스크램블드에그
D-Fac은 미군 부대 내 사병(士兵)들이 이용하는 식당을 미군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미군 부대가 주둔하는 지역인 캠프(Camp)의 규모가 클수록 D-Fac도 여러 개다. 직업군인인 미군들이 소정의 식비(食費)를 치르는 것과 달리 한국군 신분인 카투사들은 돈을 내지 않는다. 내가 복무하던 1980년대에는 메스 홀(Mess Hall)이라 불렀다. 여럿이 모여 집단으로 식사하는 공간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명칭상으로는 D-Fac이 좀 더 그럴듯하다.
카투사들에게는 식비가 면제되는 밀 카드(Meal Card)가 발급됐다. 삼시 세끼를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메스 홀 출입증인 셈이다. 자대 배치 후 처음으로 메스 홀에 가던 날 아침에 바로 위 선임이 주의 사항을 말해주었다. 조식(朝食) 첫 코스인 달걀 프라이를 주문할 때 무조건 “same”이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하는 나에게 선임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시늉을 했다.
스크램블드에그와 팬케이크. ⓒAndy L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식판을 든 미군과 카투사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 내 차례가 왔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선임이 “스크램블”이라고 말했고 나는 선임이 시킨 대로 “same”이라고 말했다. 달걀 프라이는 아침 식사 때마다 두 개씩 제공됐는데 요리 종류가 여러 개라 개인이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병은 물론이고 계급이 낮은 카투사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날마다 스크램블만 먹었다. 만드는 방식이 간단하고 조리에 걸리는 시간이 아주 짧았기 때문이었는데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스크램블의 원래 명칭은 스크램블드에그(scrambled egg)다. 노른자와 흰자를 섞은 뒤 주방용 철판 뒤집개로 휘저어 가면서 토막 내듯이 두드려 익힌 요리인데 손쉽게 금방 만들 수 있는 초간단(超簡單) 요리다. 우리나라 양식당(洋食堂)에서는 우유를 섞어 만든다는데 미군 부대에서는 달걀만 사용했다.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이 번거로워서인지 시간에 쫓겨서인지, 미군들도 주로 스크램블을 시켜 먹었다.
오믈렛과 구운 식빵. ⓒtranscendancing • Mushroom, Blue Cheese and Caramelised Onion Omelette, Twenty and Six Espress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림의 떡, 오믈렛
상병을 단지 오래된 선임병이나 병장들은 눈치 볼 일이 없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오믈렛을 시켜 먹었다. 오믈렛은 얇게 부친 달걀에 고기와 양파 피망, 버섯, 토마토 따위의 갖은 채소를 잘게 썰어 볶아 싼 달걀말이의 완결판이다. 시각적인 멋이 뛰어나고 맛도 좋고 배까지 불러 먹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매력적인 음식이라 인기가 많았다. 오믈렛에 들어갈 식재료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가령 피망과 토마토를 빼라든지 하는 식이다. 준비된 식재료를 다 넣기를 바라면 everything(omelet)!이라고 말했다.
미군들도 카투사 병장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췄다. 상병들에게까지는 계급을 뺀 이름만으로 호칭하던 미군들도 병장을 부를 때는 꼭 이름 앞에 sergeant(병장) 자를 붙였다.
노른자를 깨뜨리지 않고 달걀의 흰자만 살짝 익힌 sunny side up은 난도(難度)가 높아 조리병들이 마뜩잖아했다. 화력(火力) 조절과 익히는 시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sunny side up을 주문할 때는 조리병의 눈 화살을 각오해야 한다. 달걀을 철판에 깨뜨렸을 때 왕왕 노른자가 터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새 달걀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조리병의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다. 카투사 병장들도 웬만해선 주문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럴진대 신참(新參)이나 졸병(卒兵)들은 오믈렛이나 sunny side up을 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고 시킬 수도 없었다. 대다수가 미군인 조리병 중에는 카투사도 한둘 섞여 있었다. 우리 중대 선임 한 명도 제대할 때까지 조리병으로 근무했다.
시리얼. ⓒTh78blu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침 식사의 메뉴로는 달걀 프라이와 함께 팬케이크, 식빵, 시리얼, 베이컨, 과일 등이 제공됐다. 우유와 토마토 주스, 오렌지 주스, 콜라, 사이다, 커피 따위는 비치된 음료 디스펜서에서 먹고 싶은 만큼 따라 먹을 수 있었다. 쓰린 속을 다스릴 수 있는 해장 음식이 있을 리 없는 메스 홀에서 과음한 다음 날 아침에 마시는 오렌지 주스와 토마토 주스는 숙취 해소에 도움이 돼 카투사들이 즐겨 마셨다. 오렌지 주스와 토마토 주스에 함유된 비타민 C가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탈수 현상을 막아준다고 하니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점심과 저녁때는 스테이크와 오븐에 구운 치킨, 햄버거 등이 번갈아 나왔고 스파게티와 미트볼, 소시지, 샐러드, 감자튀김, 케이크, 쿠키, 라이스 등을 골라서 먹었다. 미국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11월 네 번째 목요일) 연휴에는 칠면조 바비큐도 맛볼 수 있었다.
#김치와 쌀밥의 등장
상병 때쯤, 배식대(配食臺) 한쪽에 김치와 쌀밥이 등장했고 곧이어 컵라면도 먹을 수 있었다. 양식(洋食)에 질려 메스 홀을 가기 싫어하는 카투사들도 컵라면은 좋아했고 컵라면에 밥을 말아 김치 하나만 반찬 삼아 먹는 일이 많았다. 입맛이 없을 때는 찬물에 밥을 말아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캠프 케이시 메인 D-Fac. ⓒU.S. Army photo by Staff Sgt. Victor F Perez Vargas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삼시 세끼 양식 문화에 갇힌 카투사들은 자대에 온 지 6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견디지 못해 속을 태운다. 이때부터 메스 홀 출입이 뜸해진다. 집에서 김치와 밑반찬을 가져와 방에서 밥을 지어 먹거나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서 먹는 일이 잦아진다. 스낵바에서 육개장과 비빔밥 따위의 한국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부대 밖 민간 음식점을 드나드는 횟수도 많아진다. 먹성이 좋아 전역할 때까지 메스 홀 음식을 마다하지 않는 카투사도 없지는 않았다. 나의 카투사 후배로 2018년에 전역한 아들에 따르면 요즘에는 방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은 드물고, 막사마다 전자레인지 등 간이 주방 시설이 있어 간편식을 사다가 데우거나 끓여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영내(營內)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치킨이나 피자, 햄버거 따위를 배달시켜 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일병을 달고 한두 달 지나면서부터 메스 홀에 가는 날보다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