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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일기

14. 미군 부대 막사(幕舍, Barracks)

by 박인권

14. 미군 부대 막사(幕舍, Barracks)


#2인 1실

미군 부대 막사의 개인 생활 공간인 2인 1실 방(房)으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개인 침대와 옷장, 냉장고, 전기스탠드가 놓인 책상과 서랍장이 있고 처음 보는 휴대용 인덕션도 눈에 들어왔다. 카투사들은 휴대용 인덕션으로 밥을 짓고 라면을 끓이고 김치찌개를 요리해 먹었다. 담배를 피우는 카투사들에게 휴대용 인덕션은 라이터나 성냥 대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인덕션에 달린 전기 코드를 콘센트에 꽂으면 인덕션의 동력체(動力體)인 니크롬 전열선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공간의 크기도 대학 시절의 하숙방보다 훨씬 넓어 둘이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냉난방 장치가 가동되는 방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더위와 추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에어컨 시설을 갖춘 가정집이 드물 때라 냉난방이 상시로 제공되는 막사 환경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막사 방의 형태는 2인 1실이 대다수인 가운데 1인 1실도 더러 있었고 아주 드물지만 3명이 한방을 쓰기도 했다.

미군들은 방에 TV를 갖다 놓기도 했다. TV는 부대에서 지급하는 비품이 아니어서 사비(私費)로 사야 했다.


우리 중대원인 폴란드계 미군 상병은 카투사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가운데 왼쪽 모자 쓴 이가 우리가 D라고 부른 폴란드계 미군 상병이다. 카투사 피크닉 때 동참한 모습.

#폴란드계 미군 상병

우리 중대 카투사들과 친분이 두터운 또래의 폴란드계 미군 상병도 자기 방에 TV를 들여놓았다. 한국어가 유창하지는 않으나 눈치가 빠르고 보디랭귀지에 능해 일상적인 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이 많아 중대 카투사들 모두 그를 좋아했다. 일과(日課) 후 카투사들과 어울려 부대 밖 레스토랑에서 술도 자주 마셨는데 그럴 때마다 술값을 혼자 계산했다. 카투사들도 매번 얻어먹을 수만은 없어 이따금 손사래를 치면 월급이 쥐꼬리보다 못한 카투사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며 기어코 먼저 지갑을 열었다. 더치페이 문화가 일상적인 미군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인 데다 생색을 내지도 않아 늘 고맙고 미안했다.

우리 중대 카투사들은 그를 D라 불렀다. D는 그의 이름 머리글자다. 이름을 발음하기 까다로워서였는데 그도 그렇게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카투사들은 독방(獨房)에서 홀로 지내는 그의 방에 자주 놀러 갔다. 내가 난생처음 슈퍼볼을 TV로 보게 된 것도 그의 방에서였다.


#슈퍼볼

1986년 1월 26일 제20회 슈퍼볼이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 슈퍼돔(2021년부터 시저스 슈퍼돔으로 개칭)에서 펼쳐졌다. 한국시간은 1월 27일 월요일 오전. 비공식 슈퍼볼 홀리데이인 이날 아침 D는 친한 카투사들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대여섯 명의 카투사들은 오전 8시 30분경 D의 방에 모였다. 카투사들이 슈퍼볼에 문외한인 것을 잘 아는 D는 입에 침을 튀겨가며 입담을 늘어놓았다. 설명해 봤자 알아듣기 힘든 규칙보다는 슈퍼볼의 역사와 특징, 눈여겨볼 만한 선수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캔맥주를 마시며 주한미군 방송망인 AFKN(American Forces Korea Network, 지금은 AFN Korea)에서 라이브로 송출한 경기를 지켜봤다. 일방적인 경기였다. 경이로운 수비력을 발휘한 시카고 베어스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46-10으로 대파하고 첫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시카고 베어스의 짐 맥마흔(1959~)이란 선수가 당대 최고의 쿼터백이란 사실도 이날 알았다. 슈퍼볼이 열리는 날은 미국 전역이 들썩거린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미국 프로미식축구 리그인 NFL(Nation Football League)의 결승전인 슈퍼볼은 단판 승부로 우승을 가린다. 2022년부터는 매년 2월 두 번째 일요일(한국시간은 월요일 오전)에 열린다.

단일 경기 스포츠로는 전 세계 최대 규모인 슈퍼볼의 광고 단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2025년 2월 9일에 개최된 제59회 슈퍼볼의 30초 광고비용은 무려 8백만 달러를 호가했다고 한다. 경기를 시청한 인구만 역대 최고인 1억 2천7백70만 명. 슈퍼볼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미국인들의 문화이자 축제다.


제59회 슈퍼볼 식전 행사. ⓒelisfkc2 • Super Bowl LIX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개방형 막사

막사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들이 열병(閱兵) 대형처럼 줄지어 있고 막사 중앙에 1인용 샤워실 10여 개가 설치돼 있었다. 샤워실 옆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초대형 거울 아래로 여러 명이 세수와 면도를 할 수 있는 세면대(洗面臺) 여남은 개와 그 맞은편으로 양변기가 설치된 다수의 화장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미군 부대와 용역 계약을 체결한 업체에서 관리하는 막사와 화장실의 청결 상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미군들은 여군의 비중도 작지 않았다. 남성용 막사와 여성용 막사가 구분돼 있었지만, 막사 간 거리가 아주 가깝고 특별한 출입 제한 조치도 없어 마음만 먹으면 드나들 수 있었다. 카투사들이 거주하는 막사에는 미군들이 많았다. 부대 사정에 따라 들쑥날쑥했지만, 중대원 180여 명 중 카투사는 20명 안팎이었다.

카투사는 카투사끼리, 미군은 미군끼리 방을 배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어쩔 수 없이 카투사와 미군이 룸메이트가 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생활 풍습이 서로 달라 카투사나 미군 모두 달가워하지 않았다.


희한한 점은 적지 않은 미군들이 자기 방이 독방(獨房)이나 되는 양, 룸메이트를 의식하지 않고 라디오나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미군과 방을 함께 사용하는 카투사가 가장 힘들어하는 지점인데 안 그래도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불편하고 어색한 판에 심각한 다툼의 원인이 됐다. 요즘에는 병영 생활 문화 개선을 위한 교육 덕분에 카투사와 미군 사이의 갈등도 예전처럼 심하지는 않다고 한다.


제59회 슈퍼볼 경기 장면. 2025년 2월 9일(한국시간 10일) 뉴올리언스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40-22로 꺾고 2018년 이후 7년 만에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elisfkc2 • Super Bowl LIX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자유분방한 미군들의 병영 생활

자대에 갓 배치된 카투사 신병들은 복무 초창기, 한 번씩 문화적 충격에 빠진다. 여군 막사를 불쑥 드나드는 미군 남성이나 남자 막사에 여군의 모습이 목격될 때다.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카투사 고참(古參)들은 그러려니 하며 애꿎은 하품만 할 뿐이지만, 신병들 눈에는 결코 예사롭게 보일 수가 없다. 개방형 막사 환경과 병영 문화가 곧 직장 문화인 미군 사병들의 특수성, 이성 교제에 대한 자유분방한 풍속 따위가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미군 장교 막사는 사병 막사와 멀찌감치 떨어진 별도의 장소에 있었고 사병들이 드나들 일도 없었다.


#의류 건조기

카투사 신병들이 또 하나 놀라는 일이 있다. 막사 내 외진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세탁기 옆 물건의 정체를 알고 나서다. 손수 시범을 보이는 바로 위 선임이 세탁기에서 세탁된 옷가지를 꺼내 세탁기와 똑같이 생긴 바로 옆 기계 장치의 뚜껑을 열고 넣은 뒤 작동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것이 의류 건조기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의류 건조기 덕분에 카투사들은 빨랫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빨래를 해본 사람은 알지만 의류 건조기의 유용성은 대단하다. 40년 전 일이다.

막사 옆 한 건물 안에는 다용도실(Day Room)이라고 불린 특이한 공간도 있었다. 음료와 담배 자판기, 소파, 당구대가 설치된 휴게실이다. 명칭과 달리 카투사들의 발길은 뜸했다. 다른 선택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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