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일기

18. 검문검색(檢問檢索)

by 박인권

18. 검문검색(檢問檢索)


빨간 외관의 ○○여객 버스

수도권 전철 1호선이 통과하는 102개 역 중 보산역은 상행선 끝에서 다섯 번째 역이다. 역을 빠져나와 길 하나만 건너면 미 제2보병사단 정문이다. 이곳에 근무하는 카투사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전철 노선이다. 보산역은 2006년 12월 의정부 북부역(지금의 가능역)~소요산역 연장 노선이 개통되면서 생겼다. 동두천에 전철이 없던 40년 전 미 2사단 카투사들의 교통수단은 버스였다. 서울로 외박을 나갈 때면 빨간 외관의 ○○여객 시외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부모님이 거주하는 지방의 본가(本家)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대 정문 담벼락 너머로 넓게 펼쳐진 공터에 매표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부대 앞에서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어 편리했고 승차감도 뛰어났다. 버스는 의정부를 거쳐 지금은 폐장된 수유리 상봉터미널까지 운행했다. 부대에서 수유리까지는 1시간 20분 남짓 걸렸다. 승객들은 상봉터미널에 도착하기 전, 대로변 정류장에서 많이 내렸는데 바로 앞에 4호선 지하철 수유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서울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거나 지방행 열차를 탈 수 있는 서울역까지 갔다. 승객 중에는 카투사뿐 아니라 미군과 한국군도 있었고 일반인도 더러 보였다. 버스는 의정부 터미널에서 한 번 정차한 뒤 곧장 수유리까지 달렸다.


도봉산 검문소

수유리까지 오는 도중에 흥미로운 광경 하나가 펼쳐진다. 경기도 경계 지점을 벗어난 버스가 서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한국군 MP(Military Police, 헌병)가 위병(衛兵)으로 배치된 도봉산 검문소다. 검문소는 탈영병이나 휴가증 없이 위수 지역을 벗어난 군인, 군기가 불량한 군인 등을 검문 검색할 목적으로 설치된 군사 시설이다.

검문소 앞에서 버스 기사는 익숙한 듯 차를 세웠다. 훤칠한 키의 MP가 버스에 올라타고 의례적인 거수경례를 부친 뒤 정면을 응시하면 차내에 긴장감이 흐른다. 눈썹 아래까지 내려오도록 번쩍거리는 파이버를 꾹 눌러쓴 MP의 눈은 보일 듯 말 듯한데, 시야 확보를 위해 고개를 살짝 치켜들 때 드러나는 눈매가 매섭다. 승객들은 침묵 속에서 MP의 동태(動態)를 살피며 속히 검문이 끝나기만 바랄 뿐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번갈아 힐끔거리는 MP가 버스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군복 바지 아랫단에 찬 쇠사슬 링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MP는 검문 대상을 미리 점찍어 놓은 듯, 몇 걸음 이동하고서 한 승객 앞에 멈춰 선다. 걸려드는 승객은 십중팔구 한국군이다. 검문하는 사람과 검문당하는 사람의 표정은 엇갈린다. 검문하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위압적이고, 검문당하는 사람은 위축되고 긴장한 모습이다.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MP는 단호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일부러 말끝을 흐린다.


“신분증…, 휴가증은…”

켕기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군인은 상의 가슴에 달린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신분증과 부대장 직인이 찍힌 종이 휴가증을 꺼내 내민다. 이럴 때 MP가 내리는 결론은 두 가지 중 하나다. 통과 아니면 하차(下車). 전자는 신원이 증명되고 휴가증에 하등의 하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 후자는 휴가증에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거나, 용모나 태도가 단정하지 않아 공연히 트집을 잡으려 할 때다.

후자의 사례는 종종 목격된다. MP를 따라 하차하는 순간, 군인의 계획은 꼬인다. 이때부터 하차한 군인의 모든 선택권은 MP로 넘어간다. 억울한 일도 많을 것이다. 휴가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경우가 그렇고, 스스로 감정선을 통제하지 못해 갑질의 횡포를 부린 MP 때문인 경우가 그렇다. 내가 본 그날의 군인도 골치가 꽤 아팠을 것이다.


MP로서도 할 말은 있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군 검문검색의 최일선에서 군율(軍律)에 어긋난 일탈을 적발하고 사병들의 기강 확립의 첨병 역할을 위해서는 스스로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 그의 선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하는 것이 MP의 사명이고 도리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교육받았을 터. 그의 말투와 표정, 움직임 하나하나는 처음부터 그랬다기보다는 반복된 학습과 실전 경험이 쌓이면서 길든 반사적 행동양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치 판단의 여지를 덜어낸다면 직업적 숙명 또는 보직(補職)의 특성에서 비롯된 후천적 행태가 아닐까.


한탄강 초입에서 만난 위병(衛兵)

나도 검문을 받은 적이 있다. 상병 때다. 휴일 오전 중대원들의 편의를 위해 한 대씩 지급된 자전거를 타고 홀로 한탄강을 찾았다. 한탄강 일대는 군부대가 많은 군사 지역이라 곳곳에 검문소가 있다. 사복 차림이었다. 소요산을 거쳐 전곡을 지나 연천으로 접어드는 국도에서 위병이 자전거를 세웠다. 헤어스타일에서 군인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카투사 신분증은 모두 영어 약자로 적혀 있다. 제목(IDENTIFICATION CARD) 아래의 부대(2nd INF DIV)와 소속(H.H.C. H.H.C. M.M.C), 신분(KA), 주특기(AD. CLERK), 이름(PARK I.K), 계급(CPL)….


신분증을 받아 든 위병은 고개 숙여 한참을 쳐다보다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라고 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신분증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느껴져 짜증이 났을 것이다.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뭐라고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한탄강 초입까지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서울로 가는 ○○여객 버스 안에서도 아주 가끔 신분증을 보여줄 일이 있었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한탄강의 경관은 수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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