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일기

19. Sick Call

by 박인권

19. Sick Call


술병(病)과 꾀병

미군 부대의 하루는 PT(Physical Training)로 시작한다. 여름철엔 새벽 5시, 겨울철엔 새벽 5시 30분. 졸리는 눈을 비비며 중대원들이 PT 장소로 모여드는 시간이다. 단잠이 강제로 깨어 카투사나 미군 모두 피곤한 낯빛이다. 해가 뜨기 한참 전, 춥고 어두컴컴한 겨울철 PT 광경은 더욱 스산하다.

PT 때면 유달리 기진맥진한 사병들이 있다. 전날 통음(痛飮) 한 경우다. 감기 몸살 등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그렇게 보이는 경우도 물론 있다. 문제는 과음한 병사들이다. 경험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술이 덜 깬 날 새벽 기상은 죽음이다. 지독한 숙취의 늪에서 허덕일 때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앞은 노랗다. 이럴 때 하는 수 없이 꺼내 드는 카드가 Sick Call이다. 질병이 아닌 술병(病)이라 양심에 찔리는 일이나 당사자로서는 어쩔 수 없이 꺼내 드는 자구책이다.


Sick Call은 몸 어딘가에 탈이나 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를 추리는 환자 소집 절차다. 주로 2마일 러닝 전 스스로 아픈 증세(症勢)를 신고하고 PT를 면제받는다. PT에서 빠지는 대신 캠프 내 의무 병원(Troop Medical Clinic)에서 발급받은 진료 소견서를 제출해야 한다. 질병 환자는 대개 감기에 걸린 사병들이고 다리나 팔을 다친 환자도 PT 대열에서 제외된다.

카투사와 마찬가지로 미군들도 성가시고 힘든 PT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종종 꾀병을 핑계로 PT에 불참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이유다. 꾀병은 정황상 의심이 가지만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눈치도 없이 함부로 나섰다가는 노련한 상급자의 눈총을 사 망신당할 수도 있다. 꾀병도 요령껏 부려야 한다.


메디컬 클리닉의 한국계 미군

맨 처음 메디컬 클리닉에 갔을 때다. 한국계 미군인 듯한 접수창구의 병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Blood Type?” 글자로 봤다면 금방 알아챘을 평범한 질문에 반응할 수 없었다. 발음 때문이었다. 자대에 갓 배치된 신병의 티를 아직 벗지 못할 때였다. 생활 영어가 낯설고 원어민의 발음이 생경한 카투사 신병들은 복무 초기, 언어 소통에 애를 먹는다. 두 번을 되풀이한 물음에 대답을 못 하자, 창구의 군인은 신경질적으로 세 글자의 우리말을 쏘아붙였다.

“혈액형?”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방 약을 타서 메디컬 클리닉을 나서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자~식, 한국말을 할 줄 알면서 괜히 심통을 부리고 난리야.”

아직 의사소통이 익숙지 못한 카투사 신병을 한두 번 상대한 것이 아닐 텐데, 창구의 한국계 미군은 매번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고 그 후로도 그랬을 것이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의 유전자 속에는 분명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터. 영어만큼이나 한국어에도 능통한 그가 아직 미군 부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언어적 장벽에 갇힌 카투사 신병의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면박을 주는 듯한 행동에 화가 났다.


희한하게도 한국계 미군들은 카투사 앞에서 한국말보다는 영어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카투사를 미군과 동일시한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인지, 태생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인지, 또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후로 메디컬 클리닉을 몇 번 더 갔지만 신병 때 만난 한국계 미군은 볼 수 없었다.


발치의 통증

상병 계급장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통(齒痛)을 심하게 앓았다. 치통약을 먹었는데도 통증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메디컬 클리닉의 미군 군의관은 충치(蟲齒)의 상태가 심해 발치(拔齒)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를 뽑고 나니 지긋지긋한 통증이 사라져 살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이 지나고 마취가 풀리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처방받은 약은 치아 발치 후의 통증을 제어하는 데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통증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사정없이 짓눌린 신경세포가 극한의 고통을 유발해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공포심이었고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엄습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대 위에서 괴롭게 뒤척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방졸(房卒)인 후배 카투사가 보다 못해 어딘가에서 황도(黃桃) 통조림을 사 왔지만, 먹을 기력도, 입맛도 없었다. 뜬눈으로 끔찍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사납게 신경을 할퀴던 통증의 기세가 제풀에 지쳤는지 꼬리를 내렸다.

섬세하지 못한 발치 기술과 통증약 성분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에 이르자 민간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충치의 원인을 뿌리 뽑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전혀 다른 이유로 메디컬 클리닉을 찾는 카투사들도 더러 있었다. 남성의 성적 상징과 관련된 외과적 수술을 받기 위해서인데 비용이 무료였다. 1980년대 중반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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