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두 명의 미군 사단장에 대한 기억
20. 두 명의 미군 사단장에 대한 기억
사단장의 지프차
특이한 경험이었다. 부대 근처 영외(營外)의 근무지에서 일과를 마치고 영내(營內) 숙소로 돌아갈 때였다. 통근용 자전거를 타고 사단 정문을 막 통과할 즈음, 맞은편에서 지프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흔한 광경이라 속도를 줄이고 페달을 밟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지프차 번호판 자리에 빨간색 바탕에 별 두 개가 박힌 성판(星板)이 보인 것이다. 난데없는 사단장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갓길에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에서 내려 부동(不動)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이려는 찰나,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사단장은 탈착식 지프차의 지붕을 걷어낸 달리는 차 안에서 손사래를 치며 괜찮으니 그냥 가라고 외쳤다.
“That’s okay. Just go.”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사이, 지프차는 순식간에 정문을 빠져나갔고, 전광석화처럼 들이닥친 두 번의 놀라움에 머리가 하얘진 내가 다시 자전거에 오르기까지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다. 길거리에서 사단장을 만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굳이 안 해도 그만인 일개 사병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듯, 태연스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사단장의 마음 씀씀이는 또 어떤가. 사단장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면서 그것만으로 자신에 대한 예우는 충분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는 아마 진정성이 확인됐다고 생각한 그 상황에서 거수경례의 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한낱 불필요한 요식 행위일 뿐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연거푸 현실이 된 사실을 실감할 수 없던 차에, 친분이 있는 동료 미군이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미군 클럽에 몰래 나타난 사단장
사복 차림을 한 사단장이 미군 클럽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평소 사단장과 대면할 일이 없어 얼굴을 알 리 없는 미군 사병들로선 사복을 입은 사단장은 그저 한 명의 나이 든 동료일 뿐. 술 취한 사병 한 명이 흥을 이기지 못하고 장난 삼아 옆자리에 앉은 사단장의 목을 감싸며 레슬링의 헤드록 기술을 걸더란 것이다. 술자리의 미군 중 사단장임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고 현장을 목격한 나의 동료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사단장은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는데 그것은 공(公)과 사(私)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투철한 직업 정신과 후덕한 그의 인성 때문일 것이다.
사단장이 할 일이 없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터. 그는 일과 후 지극히 사적인 자리에서 경청하는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통해 사병들의 애로사항과 사기 진작의 실태를 직접 점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지휘관을 상관으로 둔 부하들에게서 비뚤어진 일탈 행위를 보기란 쉽지 않다.
이날 일은 티 나지 않게 사단장을 수행한 부관에 의해 훗날 미군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미군의 병영 문화가 공적 영역을 벗어난 사적 영역에서는 자유분방한 특성이 있다지만 사단장의 행동은 분명 파격적으로 보일 만하다. 미군들 사이에서도 사단장의 사례가 화제가 됐다고 하니, 사단장은 탈권위적인 성격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단장을 마다할 사병은 없다.
그러고 보니 지프차에는 사단장과 운전병 두 명만 타고 있었다. 통상 사단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부관이 동승(同乘) 하지 않았다는 것일 텐데, 실제로 그랬는지 부관이 운전병 대신 운전대를 잡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느 쪽이든 형식 요건에 얽매이지 않는 사단장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단장일 때도 이랬는데, 위관급이나 영관급 장교 때 그가 부하들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직위를 내세우지 않고 이타적인 솔선수범을 몸소 실천하는 참군인이라 여겨졌다.
카투사 전역병 수료식에서 만난 후임 사단장
후임 사단장도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전역을 며칠 앞두고 한국군 지원대대 인사과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카투사 전역병 수료식을 사단장이 직접 주재한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이례적인 일이라 다들 놀랐다. 캠프 케이시와 캠프 호비 소속 카투사 전역 대상자 ○○명이 사단 내 강당에 모였다. 간략한 축사를 마친 사단장은 전역병 전원을 단상으로 불러올려 감사장을 수여하고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그간의 노고를 격려했다. 딱히 대수로울 것이라고는 없을 수료식에서 대수로운 울림이 느껴진 이유다. 전임 사단장과 마찬가지로 후임 사단장 밑에서 근무하는 미군들의 사기(士氣)가 예사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역 후 우연한 기회에 전임 사단장이 제7대 한미연합사령관(1993~1996)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인품과 능력을 겸비한 두 사단장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근무했다는 자긍심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지난해 별세한 게리 럭 육군 대장(1937~2024)이 전임 사단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