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무교동 성궁 호프
33. 무교동 성궁 호프
경의선숲길
오래전에 알았던 인물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날 때가 있다. 반가우면서도 신기한 이런 경험은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경의 중앙선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이 시끌벅적하다. 전철에서 쏟아져 나온 청춘의 물결이 이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경의 중앙선 홍대입구역의 출구는 다섯 군데다. 이 중 3번 출구 주변은 유독 20대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바로 앞에 젊음의 성지(聖地), 경의선숲길이 펼쳐져 있어서다. 숲길을 따라 경쟁하듯 카페와 빵집, 편의점과 음식점, 술집과 기념품 가게가 500미터 남짓 떨어진 연남파출소 삼거리 근처까지 빽빽이 들어서 있다.
3번 출구에서 연남파출소 삼거리까지 이어지는 폭 5미터가 될까 말까 한 인도(人道) 겸 도로에는 오가는 행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자동차와 배달 오토바이 행렬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분주하게 지나간다. 도로 오른편으로는 바닥에 돌이 깔린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연인 또는 친구로 보이는 남녀의 무리가 곳곳에 놓인 벤치에 앉거나 선 채로 수다를 떨기 바쁘고, 산책 나온 주인을 따라나선 반려견들도 신바람에 연신 꼬리를 살랑거리며 이곳을 지나간다.
연남동 기사 식당 거리
연남파출소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이어지는 약 400미터 길이의 대로변은 택시 기사들이 끼니를 때우려 몰려드는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곳에 순댓국집과 생선구이 전문점, 돼지불고기 백반집 등 가격이 싸면서 맛있고 음식 인심이 좋은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택시 기사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주차가 편리하고 가성비가 뛰어난 데다 일반인들까지 몰려들면서 10여 곳의 기사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택시 기사들의 휴식처이자 사랑방 구실도 한 기사식당은 그러나 2015년 6월 경의선 숲길 공원이 오픈되자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 일대에 젊은이들이 대거 몰려들고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음식점 앞 주차 공간은 공영주차장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자 택시 기사들은 하나둘 발길을 돌렸고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운 젊은이들이 찾는 곳은 새롭게 문을 연 카페와 술집 등이었다. 30년 넘게 택시 기사들의 밥심을 책임진 연남동 기사 식당 거리가 추억이 된 이유다.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영업한 복어(鰒魚) 해장국집도 있었다. 연남파출소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맛집으로 알아주는 식당이다. 이 집 역시 경의선 숲길의 등장 이후 빈 테이블이 늘어나다가 하루 매출이 활황기의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한 2017년 8월 30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지금은 지하철 2호선 합정역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영업 중이다.
복어 해장국집에서 만난 초로의 여성
가게 이전 한두 해 전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이 집을 방문했을 때다. 동료와 함께 식사를 끝내고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 석 자를 큰 소리로 불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초로(初老)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몇 초 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의 입에서 ‘성궁’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생각이 되살아나 깜짝 놀랐다.
성궁은 프레스센터 뒤 무교동 호프집의 상호(商號). 그녀는 그 업소에서 오랫동안 지배인 역할을 한 직원이었다. 기자들은 그녀를 ○마담이라고 불렀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지 10여 년이 흘렀는데도 내 이름을 오롯이 기억하는 게 신통했다. 하긴, 그녀가 성궁에서 일할 때 말단 기자에서부터 간부는 물론 임원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성궁은 프레스센터에 입주한 신문사 기자들의 단골 술집이었다. 프레스센터 바로 뒤라 술을 좋아하는 기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집 드나들 듯 찾았다. 점심때는 반주(飯酒)를 곁들인 생태찌개를 즐겨 먹었고, 저녁때는 맥주를 마셨다.
성궁의 전신(前身)은 다방이었다. 프레스센터가 건립되기 전, 성궁 다방은 한국 신문회관 지하에 있었다. 언론인과 문인, 정치인, 영화인, 산악회 회원들의 만남의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신문회관이 헐리고 1985년 11월 그 자리에 프레스센터 건물이 세워진 뒤 프레스센터 뒤편으로 이전해 영업을 이어가다가 호프 주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마담
막 입사한 1988년 봄, ○마담을 처음 보았다. 부서 선배들 손에 이끌려 점심도 이곳에서 자주 먹었고 술도 이곳에서 자주 마셨다. 마흔 안팎으로 보이는 그녀는 평균 이상의 용모에 입담이 세고 친화력까지 뛰어나 인기가 많았다.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그녀를 찾았고 그럴 때마다 요령껏 넉살을 부리며 손님들 비위를 잘도 맞췄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신입인가 봐. 멀끔하게 생겼네. 자주 와요.”라고 배시시 웃었다. 두 번째 성궁을 찾았을 때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이름을 밝힌 적이 없기에 적잖이 놀랐다.
그녀는 영업 감각이 남달랐다. 이름을 기억하는 재주가 비상했고 손님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술 실력도 상당했다. 때로는 말벗으로, 때로는 대작(對酌) 파트너로, 때로는 고민 상담의 도우미 역할까지 한 덕분에 호프집은 연일 손님들로 들끓었다. 그녀가 합석하면 술판에 흥이 오르고 덩달아 매상(賣上)도 올랐다. 그렇다고 몸가짐이 흐트러지거나 말실수하는 법도 없었다. 자신의 도리를 알아서 지키고 어떤 경우에도 선을 넘지 않았다.
기자들의 인적 사항과 사내 동정을 꿰고 있는 것은 물론 인사(人事)와 관련된 고급 정보까지 알았다. 특히 취기가 적당히 오른 술자리에서 농반진반으로 그가 내뱉는 인물평 앞에서는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촌철살인의 재치가 묻어난 인물평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어서였다.
가령 자리에 앉기 전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신 차장은 방광에 문제가 있을 거라거나, 매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도 류 기자는 어떻게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둘 수 있었을까, 힘이 장사야 장사, 하는 식이었다.
연남동 복어 해장국집에서 만났을 때 조만간 밥 한번 먹자고 약속했는데 결국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살아 있다면 여든 살쯤 됐을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무병장수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