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기억 ①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의 손찌검
#아버지와의 원픽 장면
고향 집 아버지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일이 있다.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내 마음속 아버지와의 원픽(one pick) 장면은 다소 생뚱맞다.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고이 간직하고픈 그리움의 보물상자라지만, 아버지만 생각하면 칼날처럼 예리한 종이에 손가락 끝마디가 베어질 때의 쓰라린 아픔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옛날의 회한(悔恨)이 되살아나 나를 괴롭힌다. 그 일은 내가 아버지에게 진 불효막심한 빚이자 갚을 수 없는 빚이었기에 아주 가끔 그날로 소환될 때마다 몹시 괴로워하곤 했다.
#손찌검의 발단
그것은 내가 철들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버지로부터의 손찌검에서 비롯됐다. 손찌검의 발단(發端)은 이랬다. 나라가 혼란스럽던 1980년 5월, 꽃피고 새우는 화창한 봄날의 기운은 남쪽 지방에도 없었고 우리 집에도 없었다. 그해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석 달 전부터 찬물을 끼얹은 듯, 말이 없었던 집안 분위기는 갈수록 가라앉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와 찍은 사진. ⓒPARK IN KWON
#초등학교 동창과의 우연한 만남
이유는 단 하나, 고3 막내아들의 때아닌 사춘기 바람 때문이었다. 그해 2월 중순 사춘기 바람은 뜻하지 않게, 갑자기 불어닥쳤다. 바람의 진원지(震源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여자 친구였다. 그 아이와는 한 해 전 초여름 학원 영어 단과반 강의실에서 우연히 만났다. 강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고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 순간, 저만치 떨어진 곳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긴가민가하고 그 아이를 따라나서 학원 앞 인도로 접어들 때쯤 잠깐만요, 하고 불러 세웠다. 짐작대로 초등학교 동창이 맞았다. 그 아이도 나를 금방 알아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는 근처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5년의 세월을 거슬러 학창 시절 이야기와 서로의 근황을 묻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 쪽지 하나를 그 아이에게 건넸다.
#쪽지로 시작된 인연
다행히 쪽지에 적힌 내용을 그 아이는 무시하지 않았다. 며칠 후 그 제과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 아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우리는 한 달에 2~3번 제과점이나 분식집, 또는 시내 서점에서 잠깐씩 만났다. 남녀공학이 흔치 않을 때라 사립 여고에 다니던 그 아이는 세칭 품행이 방정(方正)하고 학업 성적이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나는 그 아이처럼 반듯한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는 나름 낭만적 학구파였다.
우리 때는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월례고사에서 친구들 사이의 존재감이 판가름 났는데, 시험성적 결과에 따라 등위를 매긴 최상위 순위를 담임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공개했다. 담임선생은 나를 호명(呼名)했다. 성적을 공개하는 방식도 그나마 중학교 때보다는 인간적이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전교생 석차를 매긴 순위표를 아예 교실 밖 복도 벽에 게시했었다.
#만남의 불가역적 조건
두 번째 만났을 때, 그 아이는 내게 언질(言質)을 하나 받아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남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불가역적(不可逆的) 조건이기도 했다. 내용은 두 가지로 간단명료했다. ‘만나는 시간은 2시간 이내, 한 달에 세 번을 넘지 않는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공부에 지장을 느끼거나 그럴 기미(幾微)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즉시 만남의 효력은 자동 종료된다.’
그 조건은 나도 바라는 것이었다. 불가역적 조건의 이행(履行)이 순조롭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부의 힘에 의한 돌연 변수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 변수가 위력적이다, 못해 파괴적인 힘을 감추고 있었는지를. 돌연 변수가 내 앞에 나타난 시기는 고2 겨울방학이 끝나고 막 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그 아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다짜고짜 언니가 나에게 꼭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집으로 데려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속으로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생각하면서 우리가 다닌 초등학교 근처 그 아이의 집에 도착했다.
#언니의 폭탄선언
“이제 둘 다 고3 올라가니 오늘 자로 둘의 만남을 중단한다. 만남은 대학 입학 후에 다시 이어가기로 한다.” 나보다 2살 위 초등학교 선배인 언니의 통보는 일방적인 폭탄선언이었다. 이유를 따져 물으니,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성 교제는 공부에 전념해야 할 고3 신분에 예기치 않은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어 원천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답변이 메아리쳐 돌아왔다. 예기치 않은 방해 요소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나도 용납할 수 없다고 버텼는데, 버팀은 그 아이가 거드는 한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말인즉슨, 평소 언니의 말을 거역해 본 적이 없어 언니의 충고를 자기로서는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고 곰곰 생각해 본 결과 충고가 지향하는 바가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 둘 사이에 오고 간 불가역적 조건의 하나인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공부에 지장을 느끼거나 그럴 기미(幾微)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즉시 만남의 효력은 자동 종료된다는 내용에 부합돼 내 발목을 잡는 꼴이 됐다. 그 아이도 언니만큼이나 단호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으로 그 아이와의 만남은 끝이었다.
#현실주의적인 안정론 대(對) 반(反)지성적 폭력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를 반(反) 학업적 위험 요소를 선제 봉쇄하겠다는 언니의 심중(心中)은 분명 현실주의적인 안정론에 입각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반(反) 지성적 폭력으로 가슴을 후벼 팠다. 예고 없이 불어온 바람은 곧장 광풍(狂風)으로 돌변해 인정사정없이 나를 깜깜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이상하게 변해버린 나를 두고 부모님은 말없이 가슴앓이만 했다.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러나 내색까지는 감출 수 없었던지, 부모님의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은 내 눈에 또렷하게 읽혔다. 형들도 말을 아꼈다. 아마 부모님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라, 속으로 짐작했다.
#광풍으로 돌변한 사춘기 바람
나의 사춘기 늦바람 광풍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학교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와 방 안에서 멍만 때렸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돌변한 담임선생과의 불편한 관계는 가뜩이나 넋이 나간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맴돌았다. 10년도 더 지난 아버지의 주택사업 부도(不渡) 이후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벌기는 어려워도 까먹는 것은 금세라는 말은 공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입시의 최전선은 고3 수험생들이 지킨다. 후방(1학년)과 중간 지대(2학년)를 별 탈 없이 건너왔어도 최전선 고지를 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고3 병사의 자발적 무장해제
나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입시 최전선의 고3 병사였다. 싸울 무기(학습량)도, 전의(戰意, 학습 의지)도, 병참 지원(가정 및 학교생활)도 모두 다 꽝이었다. 3학년 1학기가 시작되고 맞은 최전선의 첫 번째 전투에서 처참하게 털렸다. 정글의 세계인 입시전쟁에서 적(입시경쟁자)들은 나의 뻥 뚫린 경계 태세와 지리멸렬한 전투 의지, 고갈(枯渴)된 화력(火力)을 눈치채고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첫 시험과 두 번째 시험에서 연거푸 일격을 당해 기력을 상실한 나는 자포자기에 빠졌다. 나는 그저 멍 때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적은 쭉쭉 미끄럼을 타고 내려갔다. 존재감도 사라졌다.
#사달이 난 그날 밤
사달이 난 그날도 어머니 곁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뭔가 말을 걸어왔는데, 내가 학교 다니기도 싫고, 그만두고 싶다고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내 목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오른손으로 뺨을 후려갈겼다.
아버지가 노트에 기록한 6 · 25 전쟁 회고록 일부. 아버지는 전쟁 중인 1952년에 입대해 1955년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PARK IN KWON
#부자(父子)의 눈물
손찌검을 한 다음 날, 술을 한잔 걸치고 느지막이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늦더위가 마지막 심술을 부리던 9월 초, 긴 인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큰형이 처음으로 한마디 했다. 나도 힘들고 지칠 대로 지칠 때였다. 대학 안 갈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달여가 지나고 예비고사를 치렀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한 번씩 이런 상상을 한다. 43년 전 그날이 없었더라면…….
지나간 일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반(反) 사실적 역사추론이라 현실성이 없다. 다 부질없는 일이고 그것도 내 인생이다. 원래 사춘기 바람이 다 그렇고, 삶은 예측불허라 하지 않는가.
이제는 가슴속에 묻은 이 슬픈 이야기는 당시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도 까맣게 몰랐기에, 이 자리를 빌려 처음 공개한다.
#유효기간이 끝난 백기 투항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수소문 끝에 주소를 알아냈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손 편지를 보내왔다. 대구의 한 경양식집에 나타난 그 아이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주량이 약한지, 맥주 몇 잔에 불콰해져 취기(醉氣)가 임계점을 넘어선 듯 보였다. 혀가 반은 꼬부라져 있었다. 술에 취한 그 아이는 자꾸 내 눈치를 살폈다. 그 아이의 눈빛에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백기(白旗) 투항(投降)할 때의 슬픈 그림자가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