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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버지에 대한 기억 ②부도(不渡) 난 사업

by 박인권

아버지에 대한 기억 ②부도(不渡) 난 사업


#초등학교 입학식과 2부제 수업

1969년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당시 우리 집은 대구시 서구 내당동에 있었는데, 학교 이름이 동네 이름과 같았다. 왼쪽 가슴 호주머니에 손수건을 꽂고 모자와 아동용 정장(正裝)에다 왕자표 운동화로 한껏 멋을 내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치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린 꼬마가 웬 손수건? 인가 싶겠지만 그 시절 그것은 코 닦이용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때,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 학생 수가 700명을 넘나드는 콩나물시루나 다름없었다. 다른 학교도 사정은 비슷했다. 베이비 붐 세대의 끝에서 두 번째 기수인 우리 동기들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전 반과 오후 반은 한 학년 내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정한 내규에 따라 일정한 기간마다 바꿔서 오고 가기를 되풀이했다.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다. 전교생을 수용할 교실 수가 모자라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콩나물시루 교실

생각해 보라. 학년별 전교생이 700명이면, 10개 반의 학급당 인원이 70명이다. 12개 반으로 반 편성을 늘려도 한 학급당 학생 수는 60명에 육박한다. 주먹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앞뒤로 빽빽하게 배치된 책걸상 때문에 옴짝달싹하기 힘들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걸상을 뒤로 밀고 책상을 옆으로 밀쳐야 겨우 빠져나갈 정도였다.


걸상과 달리 책상은 두 명이 나란히 앉는 2인용이었는데, 말이 2인용이지 크기가 좁아터져 영역 다툼이 치열했다. 서로 조금이라도 넓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몸싸움도 불사했고, 자꾸만 부딪히는 팔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다 멱살잡이도 모자라 급기야 주먹다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책상 위 자리다툼

싫건 좋건 날마다 보는 짝꿍끼리 그때마다 드잡이를 벌일 수는 없어, 나름 지혜를 짜낸다고 짜낸 묘책이 나무 책상 위에 연필이나 분필로 공평하게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다. 가끔 경계선이 지워질 염려가 없게끔 문구용 칼로 금을 긋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선생님에게 발각되는 날엔 혼쭐이 나곤 했었다.


책상 위 자리다툼이 예외인 경우도 있었다. 대개 서로 마음이 맞는 남녀 짝꿍 아이들이 그랬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짝꿍을 바꿔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적지 않았고, 마음에 둔 아이와 짝꿍을 하고 싶은 나머지 선생님에게 애교 어린 간청을 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어머니를 방패막이 삼는 아이들도 물론 있었다. 나도 짝꿍과 제법 다툰 편인데, 서로의 필통 두 개를 세로로 줄지어 경계선을 삼았던 기억이 난다.


학교까지는 집에서 어린아이 걸음으로 15분가량 걸린 것 같다. 어머니가 일러주신 대로 등교 시간 20분 전에는 꼭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 지각생들은 1교시 시작 전, 교단(敎壇) 앞 교탁(敎卓) 양옆으로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는 벌을 서야 했는데, 어린 나도 그게 싫었다.


#갑작스러운 조퇴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초등학교 신입생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던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당시 우리 집은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아버지 덕분에 꽤 널찍한 2층 양옥(洋屋)이었는데, 가사(家事)를 돕는 도우미 누나가 같이 살고 있었다. 수업 중에 그 누나가 찾아온 것이었다. 조퇴(早退)하고 집으로 가는 내내 누나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조르듯, 말을 걸어도 누나는 억지웃음만 지으며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은 말, 부도(不渡)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여행용 짐을 싸고 있었고, 아버지는 어디론가 부리나케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와 셋이 지금 서울에 가야 한다며 입고 있던 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히셨다. 기차 타고 난생처음 서울 간다는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마냥 들떠 신이 났다. 초등학교 졸업반과 3학년이던 큰형, 둘째 형은 집에 남았다. 대구에 사는 셋째 고모가 부모님 대신 두 형들을 보살피기로 했다.

떠날 채비를 끝낸 나에게 큰형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부도났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부도라는 말은 너무 어려웠다. 형이라고 부도의 뜻을 알았을까.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형은 우리 집 다 망하게 생겼다고 내가 알아듣도록 한마디 더 거들었다. 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1차원적인 뜻풀이는 알아도 그것이 우리 식구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것이라는 현실감각이 나에게 있을 리 없었다.


동대구역 신청사. 나는 1969년 6월 동대구역 구청사가 준공된 직후 처음으로 서울행 관광열차를 탔었다. ⓒ대구광역시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관광호 열차

부모님과 동대구역으로 갔다. 우리는 이해 2월 10일에 운행을 시작한 관광호에 올랐다. 관광호는 일본의 신칸센을 모델로 도입한 국내 최고급 열차였다. 특 1등 칸과 1등 칸, 두 종류의 객실이 있었고 특 1등 칸에는 푸른 카펫이 깔려 있었다. 양 객실 모두 냉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좌석마다 승무원을 부를 수 있는 호출 버튼이 달려 있었다. 관광호라는 열차 이름만 기억나 기록을 찾아보니, 대구에서 서울까지 소요 시간이 4시간 50분, 시속은 90km였다. 1974년 현재의 새마을호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빚쟁이로 몰린 아버지

한참 후에야 알았지만, 느닷없는 서울행은 수소문 끝에 부도를 낸 사업자가 서울 모처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내당동 일대 대규모 상가 개발사업의 투자자였다. 부도를 낸 사람은 개발사업 시행사 대표로 아버지의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 아버지는 이 사업에 제1 투자자로 참여하면서 다른 투자자를 끌어들인 투자 책임자였는데,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빚쟁이로 몰리게 됐다. 투자 계약서상의 보증인 명의가 아버지 이름이라, 모든 법적 책임을 떠안게 됐기 때문이었다. 2박 3일간 행방을 쫓았으나 아버지의 절친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살던 집은 물론 우리 3형제 몫으로 미리 마련해 둔 주택 3채와 땅, 은행 예금, 채권 등 사실상 전 재산이 다 날아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겼다.


30대 후반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아버지는 전국의 산을 찾아 나섰다. 몇 주간 집을 비우고 돌아와 며칠 후 다시 산으로 떠나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가장(家長) 자리로 돌아왔다.


#회복되지 않은 가세(家勢)

내가 아무것도 모를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한번 기울어진 가세(家勢)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년 후 아버지의 절친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인신 구속 외에 달리 사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도리가 없었다. 본인 명의 재산이 있을 리 없어서였다.


아버지는 이 일로 어머니에게 특히 미안해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큰형은 나나, 둘째 형에 앞서 감수성에 눈뜰 때였는데, 결국 그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순탄치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아득한 옛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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