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창고 추억여행

11. 아버지에 대한 기억 ③전학(轉學) 첫날과 짧았던 번화가 생활

by 박인권

아버지에 대한 기억 ③아버지 손잡고 간 전학(轉學) 첫날과 짧았던 번화가 생활


#전학(轉學)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막 시작됐을 무렵, 아버지는 나에게 전학(轉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집이 곧 이사하는데 2학기부터 그 동네 학교에서 공부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게 두 번째가 될 초등학교는 전학한 1971년 기준 개교 71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였다.


내가 67회, 지난해 12월 졸업식을 치른 학생들이 116회 졸업생들이다.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됐으며 동요 ‘오빠 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선생과 ‘고향 생각’의 작곡가 현제명 선생이 모교 선배로 전직 대통령 한 명도 우리 학교 출신이다.


이사 날짜가 바뀌는 등 사정상 나는 2학기가 시작되고 몇 일지나 새 학교로 등교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전학 첫날 나는 어머니를 대신한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갔다. 학교가 낯설고 친구도 새로 사귀어야 해 당분간은 서먹서먹하겠지만, 금방 정이 들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아버지가 다독거려 주셨다.

2.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현재 모습.jpg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1900년에 개교한 학교로 내가 67회 졸업생이다.ⓒ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내 편이 되어준 짝꿍

반 아이들에게 새로 전학을 온 아무개라고 나를 소개한 미혼의 여자 담임선생은 내가 앉을자리를 지정했는데, 짝꿍이 여자아이였다. 내 짝꿍은 키가 크고 날씬한 몸매에 피부가 뽀얗고 얼굴이 예뻐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부도 잘했다. 이성에 눈뜰 나이가 아니라 풋사랑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옆자리의 짝꿍은 본능적으로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속마음은 어땠는지 알 도리가 없으나, 그 아이는 늘 나를 상냥하게 대했다. 안 그래도 쿵쾅쿵쾅 뛰는 내 심장 박동수(搏動數)는 그 아이의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재촉하는 바람에 가파르게 증가했다. 어쩌다 그 아이와 살짝 몸이라도 닿으면, 정말이지 감전(感電)이라도 된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른 아이들이 봤을 때, 우리 둘 사이가 시샘을 살만했던지 괜히 딴지를 거는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아이는 별참견도 다한다고 눈을 흘기며, 든든한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 아이는 내가 새 학교에서 부닥쳐야 할 새로운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고, 다른 아이들과도 잘 지냈다.


#짝꿍의 빈자리

늦가을이 되자 내 옆자리가 비는 날이 잦아졌다. 반 아이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병치레가 심해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못할 거라고 담임선생이 설명했지만, 그 설명을 듣는 나는 슬펐다. 2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그 아이의 이름 세 글자는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있는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姓)씨에 대구 앞산 자락의 44년 전통을 자랑하는 전국구 급 해장국으로 유명한 집의 국밥 명칭이 그 아이의 이름이다.


#가시에 찔린 발바닥 상처

전학 간 첫 학기 때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방과(放課) 후 교실 마룻바닥 청소를 하던 중 튀어나온 가시에 발바닥을 찔려 꽤 고생했던 일이다. 당시에는 실내화도 신지 않은 채 신발을 벗고 교실에서 수업하던 시절이었는데, 나무 가시가 발가락이나 발바닥에 박히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뾰족한 가시가 발바닥의 오목하게 팬 곳 중심부를 깊게 뚫고 들어가 몇 날 며칠 병원을 들락날락했었다. 다친 그날 쩔뚝거리며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통증이 너무 심해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힘들어했었다. 그 상처의 흔적은 지금도 내 발바닥에 남아 있다.


1. 1905년 영업을 개시한 대구역의 현재 모습..jpg

1905년 영업을 개시한 대구역의 현재 모습.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전 동네와 분위기가 달랐던 향촌동

새로 이사 간 집은 대구 시내 중심부 번화가에 있었다. 이전에 살았던 내당동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근처에 대구역이 있고,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등굣길은 집에서 나와 횡단보도(橫斷步道)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이면도로(裏面道路)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는 코스였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유흥시설과 숙박업소가 대거 들어서면서 대구의 중심지가 된 향기로운 동네, 향촌(香村) 동으로 지금은 수제화 골목으로 소문난 곳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신도심(新都心)에 밀려난 원도심(原都心)으로 위상이 한풀 꺾인 대신, 문화공간과 전통 맛집 등 떠오르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낯설면서 중독성 있었던 풍경

근데 이 길이 문젯거리였다. 가게들이 문을 열기 전인 등굣길과 달리 하굣길에 이 길은 어린 나를 움찔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 어린 곳이었다. 자동차가 오갈 정도로 제법 넓은 이 길은 직선으로 200m 이상 쭉 뻗어 있는데, 양쪽에 온갖 유흥주점들이 빽빽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낮부터 술에 취한 동네 건달들끼리 싸움박질을 한다거나 해거름이면 담배를 꼬나물고 원색적인 옷차림과 짙은 화장을 한 채 호객행위를 하는 유흥주점 접대부들의 노골적인 모습은 날마다 보는 일상이었다. 9살 어린아이에게 하굣길의 이 풍경은 낯설면서도 중독성이 있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이 길을 지나다가 바깥에서 안이 다 보이는 한 유흥주점 홀에 앉아 있는 한복차림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대뜸 초등학교 동창생임을 알아보고는 쓸쓸하고 우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1년 6개월 만에 이사

부모님은 학교생활에 만족해하는 나와 달리 교육 친화적이지 못한 주변 환경을 염려했다. 아버지의 사업도 사업이지만 자식 걱정이 당연한 어머니의 성화가 이어졌고 아버지도 동의했다. 1년 6개월 만에 우리 집은 주택가인 대명 5동 기와집으로 이사했다. 학교는 옮기지 않기로 했다. 그곳에서 나는 대학 진학 때까지 살았고, 부모님은 거의 30년을 살았다.


전학 간 이야기가 길어져 옆길로 샜다. 모두 다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파생된 또 다른 어릴 때의 추억이라 그때의 기억이 자연스레 되살아났다.

이전 10화행복창고 추억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