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나의 뜨거운 겨울 뉴질랜드_
4. 회피

귀뚜라미

by 맑은 하늘 흰구름
"너 그냥 회피하는 거잖아."

회사를 그만둘 때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다.

아직까지도 저 말이 몸이 피곤할 때면, 기분이 우울할 때면 그렇게 나를 따라다니며 나타난다.

그 어떤 핑계를 대보아도, 애써 힘차 보이려 해 보아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려 최면을 걸어 보아도,

퇴사할 때 나는 저 말을 피할 수 없었고, 뿌리치지 못했다.

어렸을 때 처음 친구에게 상처받았을 때처럼,

처음 사랑에 거절을 당했을 때처럼,

그렇게 마음에 남은 흉터같이 저 말이 나를 따라다녔다.


오늘 오전에 무기력함이 또 나를 지배하여 침대에 그냥 누워있었다.

여전히 저 말이 내게 올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나를 찌를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나를 회피하고 있었다.

"엄마 어떻게!!! 귀뚜라미 나타났어!!!!"

아이가 나를 불렀다.

뉴질랜드에서 렌트했던 에어비앤비 앞에는 작은 잔디가 있었다.

그리고 출입구로 쓰이는 긴 창문은 방충망이 없었다.

환기를 위해 이 창문만 열어 놓으면 곤충이 들어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어디!!!!!!"

나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난 곤충을 못 잡는다.

곤충을 잡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무섭다.

그리고 잡으려다 실패해서 내 손을 빠져나갈까 봐 무섭다.

그런 내 앞에 귀뚜라미가 나타났다.

"어쩌지!!!"

나는 손바닥만 한 (내 기억엔 그랬다.) 귀뚜라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 어떻게!!!"

아이의 호들갑에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OO아 제발 수건으로 한 번만 덮어주면 안 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없지만, 그때 난 정말 간절했다.

"안 돼. 나도 너무 무서워."

"제발 한 번만. 엄마도 그럼 같이 덮을게."

"움직이면 어떻게"

"덮으면 괜찮을 거야. 그럴걸....?"

우리는 한 손엔 수건, 다른 한 손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귀뚜라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의 수건을 던지듯이 덮고는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거실로 달아난 우리는 어떻게 할까 궁리했다.

"엄마 어떻게?"

"어쩌지? 수건 위에 책으로 덮을까?"

"그럼 죽잖아. 엄마."

"그렇지...... 어쩌지......."

"아빠에게 전화해 봐."

"아빠도 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남편은 처음엔 수건으로 덮으라더니, 이미 덮었다고 한 내게, 그럼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귀뚜라미가 수건 뚫고 나올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못 뚫어. 내가 유튜브에 귀뚜라미 쫒는 법 검색해 볼게."

"응. 안 그럼 오빠가 지금 오면 안 되겠지?"

"내가 가는 12시간 안에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너 T냐 진짜......"

그렇게 도착한 남편의 검색 결과: 휴지통으로 덮어라.

'가까이 가기가 무섭다고, 이 사람아...'

이렇게 생각한 내 손엔 휴지통이 들려있었다.

수건이 두장이나 널브러져 있어 귀뚜라미 위치가 가늠이 안 갔다.

하지만 대략적 위치에라도 덮어야 할 거 같아 가까이 가는 순간.......

귀뚜라미가 정말로 수건 터널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꺄악!!!!!!!!!!"

나와 아이는 혼비백산이 되어 화장실을 나왔고, 아이는 어느새 집 밖으로 도망쳐 있었다.

눈물이 났다.

이 순간 도망갈 방법이 없을까......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Hi, I'm staying at your Airbnb. A bug just appeared in the house. could you possibly help catch it?"

"A bug in the house? That’s strange. We’ve never had that happen before"

벌레를 잡아달라고 한 내게 주인은 벌레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순간 영어로 머라고 귀뚜라미를 하지라고 생각했다가 벌레가 아니라 곤충이라고 말해줘야겠다 생각했다.

"It’s a big insect."

"Ah, I see. It’s probably an insect, not just a bug. But we're not nearby at the moment. If you're really scared, you can cover it with a pot. Sorry!"

이 와중에도 벌레가 아니라 곤충이면 말이 된다고 한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영어가 잘 안 들려서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주인이 두 번이나 한 이야기는 '냄비로 덮어라......'이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이대로 화장실도 못이용 하는 것인가 싶을 때, 유학원 원장님이 생각났다.

얼핏 근처에 사신다고 들었어서, 희망을 가지고 연락을 드려보았다.

"저 원장님, 죄송한 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원장님은 멈칫하시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화장실에 귀뚜라미가 나타나서요. 제발 잡아주실 수 있을까요?"

원장님은 그 재서야 뭔가 안도하신 목소리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금방 갈게요. 주소 좀 남겨주세요."

원장님이 오실 때까지 나는 귀뚜라미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아이는 원장님을 기다리러 마당에까지 나가있었다.

아이의 '여기예요!' 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원장님이 오셨다.

원장님은 내가 던져 널브러진 쓰레기통에 귀뚜라미를 넣고 손으로 감싸 가지고 나가시며 아이에게 말씀하셨다.

"귀뚜라미는 해충은 아니야. 그래도 이 건 좀 크긴 크다."

그 와중에 크다는 말씀이 왜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귀뚜라미는 풀밭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감사 인사를 여러 번 드렸다.

한 밤의 소동이 그렇게 끝났다.


아직도 이 날을 생각하면 난 웃음부터 나고, 아이는 눈부터 동그래진다.

그날 원장님께 전화할 생각이 안 떠올랐음 난 어떻게 했을까?

옆집을 두드려 도움을 요청했을까?

아니면 짐 싸서 나왔을까?

아니면 살충제를 사러 갔을까? (이건 좀 생각하기 싫다.)

뭐, 아무튼 지금처럼 한국에는 돌아와 있겠지.


살다 보면, 이처럼 작은 일(나에겐 큰 일이지만.)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버거운 일까지

회피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결국 내가 흘러가 있다. 시간과 함께.

부딪쳐 보려고 한 것은 아니만 부딪쳐야 하고

결국은 끝이나 있는 일이 있다.


회사를 다닐 때, 두려웠던 것 중 하나는

알 수 없는 어려움이 내 앞에 갑자기 와있는 것.

풀 수 없는 문제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나는 그런 힘든 것들로부터 회피했던 것일까.


하지만, 회사 밖에서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찾아야 하고,

낮아진 자존감을 어떻게든 다시 세워야 하고,

나를 나에게 증명해야 하는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나야만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때 회피했던 게 맞을까.

나를 다른 곳에 던졌던 것은 아닐까.

결국 완전한 회피는 없다.

삶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의 연속이고,

그래서 두려울 수도 힘들 수 있지만,

그 것들에 즐거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웃을 수도 있다.


오늘 아침까지도 나를 따라오던 그 말,

"너 그냥 회피하는 거잖아."

그 말에서 내가 조금은 자유로워지길,


끝에는 결국
귀뚜라미는 돌아갔고,
나는 내 삶을 굴러가고 있을 테니까.

뉴질랜드에 갈 때는 방충망을 챙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