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그리고 따스함
오늘은 묵혀둔 수건들을 세탁했다. 대니의 장례식을 치른 지 딱 일주일 만이다. 그동안 대니가 떠날 때 지린 소변을 닦았던 수건을 차마 세탁하지 못했다. 남은 대니의 흔적이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추모 공간에 놓인 손수건과 이불에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지만, 가능한 한 그의 모든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다. 언제쯤 이 냄새가 그리운 냄새가 아닌 지린내라고 느껴질까.
지인이 어제 말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버티시니 다행이에요." 아마도 대니 얘기를 거의 하지 않고, 평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다행이다. 그것이 내가 타인에게 원했던 모습이었으니까. 괴로움과 힘듦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상대는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니가 떠났다는 현실이 가끔씩 갑작스럽게 밀려와서, 심장이 턱 막혀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오늘 수건을 세탁하면서, 나는 대니와의 이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리움이 괴로움이 아닌 포근한 추억으로 변해가기를 바라며, 나 자신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을 다시 떠올려보니,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상 대니의 시신을 3일 동안 보존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3일간 시신을 보존하는 것이 고인을 추모하고, 가족들이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3일간 떠나지 않는다고 믿고, 이 기간 동안 기도를 드리며 명복을 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이유들을 알지 못했지만, 대니의 시신을 3일간 보존하며 느낀 감정들은 그런 전통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 3일의 애도 기간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나중에 또 다른 이별이 닥친다면 같은 방식으로 3일을 보낼 것이다. 이것은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내게는 대니의 자매인 릴이라는 고양이가 있다. 둘은 같은 날, 같은 엄마 고양이에게서 태어났다. 릴은 대니가 침실에서 투병 생활을 할 때 거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 문 앞까지 오다가 다시 돌아서거나, 잠시 들어왔다가도 곧바로 나가는 행동을 자주 했다. 대니가 떠나고 나서도 시신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방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에는 릴이 좀 섭섭하기도 했다. 둘이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2년을 함께 보낸 가족인데 말이다.
그러나 장례식을 마치고 대니의 유골함을 가져온 날, 릴은 비로소 방에 들어왔다. 시신에서 나는 냄새가 싫었던 걸까? 아니면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회피일까? 고양이도 죽음을 인식할까? 릴은 대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쩌면 릴은 그 상실감과 슬픔을 나와 다르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릴이 방에 들어왔을때, 마치 대니의 빈자리를 조금씩 메워주는 듯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릴의 존재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대니와의 이별로 인해 마음에 생긴 공허함이 릴 덕분에 조금씩 메워지는 것 같다. 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릴의 큰 눈망울을 마주 보며 말했다. "대니 몫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내 곁에 있어줘." 릴은 눈을 지긋이 깜빡이며 대답하는 듯했다. 릴이 내 곁에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