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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Sep 26. 2024

노트 테이킹의 기술

의미의 트리거(trigger), 기억의 보조장치


통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순차통역(Consecutive Interpretation)과 동시통역(Simultaneous Interpreation)의 차이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순차는 보통 2-3분가량의 연사의 발언이 끝난 후 통역이 이루어지고, 동시는 통역 기기가 설치된 통역 부스 안에서 연자의 발언과 동시에 도착언어로 통역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순차통역에서 연사가 발언하는 2-3분 사이에 통역사들은 무엇을 할까?


노트 테이킹이다.


연사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방금 노트한 내용을 기반으로  연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최대한 충실하게 통역해야 한다.   2-3분가량의 발언에는 상당한 정보가 담기기 마련인데 어떻게 시제까지 살리는 정확한 통역이 가능할까?


쉬운 예로, 간단한 노트 테이킹을 해봤다.


1)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과거)

2) 세상은 빠르게 변할 것이다 (미래)

3)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현재 진행형)


이제 감이 좀 잡히시는지? 


#노트 테이킹은 어떻게 다른가

일을 하다 보면 노트 테이킹을 유심히 보다가 어떤 요령으로 하는 거냐고 묻는 클라이언트가 종종 있다. 아마 그분들은 회의에서 노트를 열심히 하는 유형이라고 짐작이 된다.  회의에서 더 효과적인 메모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물어본다고 하는데 사실 통역사들의 노트 테이킹과 보통의 메모와는 성격이 다르다.


목적

일반적인 노트는 나중에 참고하고 검토할 목적으로 작성하는데 반해, 통역사들의 노트 테이킹은 정보 인출의 ’ 트리거(trigger)’, 이자 기억의 ‘보조장치’로 쓰인다. 따라서 통역이 끝나고 나면 복습의 차원으로 검토는 해도 오래 보관하지 않는다. (일이 끝나고 나면 홀가분하게 모든 노트를 버리고 오는 동료들도 많이 봤다.)


내용

목적이 다르기에 작성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 보통의 노트에는 상세한 정보, 정확한 ‘인용’이나, 팩트, 설명 위주의 내용이 담기지만, 통역사의 노트에는 정확한 워딩보다는 이해한 내용을 빠르게 떠오르게 하는 주요 포인트가 구조화된 형식으로 표현된다.

실제 순차통역 중에 노트 테이킹 일부

심벌

통역사들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심벌들로 노트를 하는 점도 보통의 노트 작성과 크게 다른 점이다. 물론 통역계에서 널리 활용되는 공통적인 심벌들도 있다. 하지만 상당 부분은 공부하면서, 또 일하면서 스스로에게 잘 맞는 심벌들을 개발하고 몸에 익힌 것들이다.

기본 심벌
실제로 사용 중인 심벌 일부

속도

통역사들은 연자가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동시에 빠르게 노트를 작성하는 반면, 일반적인 노트는 주요 내용 위주로 정리하면서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작성할 수 있다.


#통역사들의 노트 테이킹 기법이 필요하다면


이해가 먼저

순차에서 잘 구조화된 노트 테이킹이 중요한 것은 분명 하나 어디까지나 이해가 우선이다.  완벽한 노트 테이킹에 과몰입해서 연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 의미‘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이해를 충분히 했다면, 기억을 트리거해주는 최소한의 노트 테이킹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살릴 수 있다.


해독가능해야

워낙 빠르게 노트를 하기도 하고, 심벌을 쓰다 보니 스스로 작성한 노트가 해독이 안될 때가 있다. 통역 중에 해독이 안되면 낭패다. 지금이야 내 노트를 못알보는 경우가 많지 않으나, 글씨를 갈겨쓰는 편인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학원 시절 일기를 보면 ‘절대 갈겨쓰지 않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접속사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는 접속사(but, therefore, becasue, despite는 반드시 표시한다. 대체적인 내용을 살렸다 해도 전환을 놓쳐서 살리지 못하면 맹숭맹숭한 통역이 나온다.  접속사 심벌은 필수로 만들어서 활용한다.


발언 끝나면 두줄로

가끔씩 연사의 말이 길어지면 노트 여러 장을 다시 앞으로 넘겨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앞서했던 발언의 마지막을 표시해두지 않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순간 난감할 때가 있다.  발언 끝나는 지점은 어떤 식으로든 표시를 하자.


노트 테이킹을 즐겁게 하는 도구들 

통역사들은 각자 선호하는 노트와 펜이 따로 있다.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늘 여분의 노트를 챙겨야 하기에 무조건 가벼운 노트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게와 상관없이 펜이 잘 굴러가는 종이질을 따지는 사람도 있다.  대개는 중간에 세로줄이 있고 뒤로 넘기는 형태를 좋아하는데,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화된 노트 쓰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펜과의 궁합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오랫동안 우리 업계에서 이미 검증된 잘 굴러가는 특정 브랜드의 펜을 써왔는데 올봄에 동료 통역사 선생님 덕분에 ‘만년필’의 신세계에 입문했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미끄러지듯 써지는 피로감에 푹 빠졌다. 동료 선생님이 선물해 준 내 인생 최초의 만년필과 파란색 잉크용으로 산 두 번째 만년필로 노트하는 게 어느새 커다란 낙이 되었다.  회의를 앞두고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있노라면 전쟁을 앞두고 총을 정성스럽게 닦는 병사의 마음이 되는 것 같다.  온종일 통역을 하다 보면 간밤에 채운 잉크를 다 써버리는 날이 있기 때문에 여분의 볼펜도 잊지 않고 챙긴다. 

즐겨 쓰는 노트와 만년필/볼펜

비밀일기

노트 테이킹이 생활화되다 보니 일기 쓸 때도 자연스럽게 심벌이 그려진다. (노트 테이킹을 체화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니 조급한 마음은 거두는 것이 좋다.) 거창한 비밀이 아니더라도 나만 해독할 수 있는 일기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닐까?


단, (스스로에게) 갈겨쓰지 말 것!!


표지사진: Unsplash

#순차통역#노트테이킹#동시통역#만년필#심볼#메모#노트#단련#연습#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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