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90년대 슈퍼모델과 폴 오스터의 그녀
#취미
얼마 전 일로만 아는 분과 점심식사를 하게 됐다. 대화 소재가 떨어져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분은 대뜸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책 보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운동합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취미라고 할 만한 게 또 있었다.
#90년대 패션
가끔씩 예전 패션쇼 런웨이 영상을 찾아본다. 그중에서도 90년대 패션쇼 영상을 즐긴다. 편안하면서도 절제미 있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데다 그 당시 활동했던 디자이너들과 모델들은 지금과는 또 다른 ‘프로페셔널’이었다.
90년대 패션이라고 하면 미니멀 패션에서 아방가르드까지 다양성이 빛나던 시대였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80년대의 패션과의 결별이었다. 80년대 패션이 과감한 스타일과 컬러로 화려함의 연속이었던 것에 반해 90년대에는 뉴트럴 컬러와 미니멀한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야스민 가우리 Yasmeen Ghauri와 더불어
지금껏 가장 좋아하는 슈퍼모델,
크리스티 털링턴 Christie Turlington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 등 90년대를 대표하는 탑모델들 가운데서도 특유의 고전미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
흔히 사람들은 나이 든 배우나 모델들의 이상하리만큼 매끈한 얼굴을 보고 ‘방부제 미모’라며 칭송한다. ‘젊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압박으로 시름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그들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외모가 절대적 자산이라고 할 수 없는 보통 사람들도 나이 드는 게 서글퍼질 때가 있다. 하물며 외모가 최대 자산이자 대중의 평가 잣대인 모델이나 배우들이 느낄 상실감은 어떠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꼽힐 정도로 완벽했던 미모와 고풍스러운 자태로 감탄을 자아냈던 크리스티 털링턴도 어느덧 오십 대 중반이 되었다. 그동안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주름진 얼굴이 더없이 기품 있고 우아하다.
성별을 떠나 아주 가끔씩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온유하고 공고한 내면의 에너지가 거죽을 뚫고 나와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아우라를 만드는 사람
-주름 하나하나 흰머리 한가닥 한가닥 마저 앤티크 주얼리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
-‘늙어감’이라는 자연의 이치에 소란스럽게 저항하지 않고 ’ 애쓰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빛이 나는 사람
폴 오스터의 그녀처럼.
“그녀는 립스틱을 바르지도, 화장을 하지도, 머리 손질을 하는 데 공을 들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여자다웠고 절제된 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사이 나는 그녀가 정신력으로 결국은 육체를 지배하게 된 그런 보기 드문 사람들 중의 하나임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노령도 그런 사람들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육신을 늙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더 들면 들수록 더 완벽하고 분명하게 자신을 구현한다. “
-폴 오스터 <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s >
표지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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