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낭떠러지 위에서 멈추지 않고 도약하기
점점 날이 차가워지는 요즘, 내 낙은 거실에서 러닝머신을 달리며 철 지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운동 중에는 아무래도 빠른 전개와 긴박함이 돋보이는 블록버스터가 제격이다. 나는 영화광이면서도 은근히 대중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경향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즐긴 히트작들을 뒤늦게 보거나, 놓친 작품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야 처음 본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1994년작 <Speed>다. 젊고 활기찬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의 모습, 그리고 폭탄이 장착된 버스가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긴박한 전개는 내내 시선을 붙잡았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도로가 끊긴 구간을 만난 장면이었다. 버스는 멈출 수 없기에 간극을 뛰어넘는 결단을 해야 했다.
이 장면을 보며, 번역하면서 내가 종종 맞닥뜨리는 상황이 떠올랐다.(통역도 마찬가지다) 번역이 쉬운 경우도 있지만, 두 언어 간 차이가 너무 커 도저히 간극을 메울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번역가는 이 간극 앞에서 멈출 수 없다. 우리는 끊어진 다리를 뛰어넘는 버스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원작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도약을 감행한다.
번역가의 두 가지 도약
번역가는 항상 두 번의 도약을 한다. 첫 번째는 원작자가 속한 세계로의 여행이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문화와 역사, 사고방식의 틀이 얽혀 있는 복합적 구조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조차 서로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물며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번역에서는 그 간극이 더욱 커진다. 두 번째 도약은 원작자의 세계를 넘어, 독자가 있는 세계로 다리를 놓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번역가는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것을 넘어, 본질적 의미와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창조적 감각과 깊은 이해를 발휘한다. 때로는 자신의 선입견과 사고방식을 비우고, 새로운 시각에서 원작을 재해석해야 한다.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
“말은 사람이 의사를 표현하려는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의식 속에서 있는 것을 무엇이나 다 표현해 내는 완전한 능력은 없는 것이다... 거의 세계어인 영어에서도 ‘inexpressible’ 이니 ’beyond expression‘이니 하는 류의 말이 얼마든지 쓰이는 것을 보면 세계 어느 언어나 표현 불가능한, 어두운 일면은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표현할 수 있는 면과 표현할 수 없는 면이 언어마다 같지 않다. 이 언어엔 ‘그런 경우의 말’이 있는데 저 언어엔 그런 말이 없기도 하고, 저 ‘그런 경우의 말’이 있지만 이 언어엔 없기도 하다.. 어느 언어든 표현할 수 있는 일면과 아울러 표현할 수 없는 일면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표현할 수 없는 면은 언어마다 달라서 완전한 번역이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사실 쯤은 알아야겠다.” -<문장강화> 이태준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이태준의 말처럼, 언어는 표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번역가를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번역가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 표현되지 못한 영역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원작자의 숨결과 정서를 다른 언어로 재창조하는 이 작업은 번역가를 단순한 중개자를 넘어 창작자로 만든다. 번역은 깊은 독서와 재구성을 요구하는 행위다. 원작의 단어 하나에 담긴 뉘앙스와 감정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번역기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며, 번역가만의 고유한 역할이다.
번역의 온기
“그런데, 언어에는 못 표현하는 면이 으레 있다 해서 자기의 표현욕을 쉽사리 단념할 바는 아니다. 산문이든 운문이든 언어에 대한 문장가들의 의무는 실로 이 표현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을 타개하는 데 있을 것이다. 눈매, 입 모양, 어깻짓 하나라도 표현은 발달하고 있다. 언어문화만이 이 어두운 면을 그대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훌륭한 문장가란 모두 말의 채집자, 말의 개조/제조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문장강화> 이태준
AI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다. 특히 번역 분야에서, 번역기가 이미 많은 기술문서를 훌륭히 처리하며 번역가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기술문서나 단순한 언어 변환 작업이라면 이 주장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문학 번역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아니, 어쩌면 번역기가 영원히 인간 번역가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번역에는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작업 이상으로 인간만이 구현할 수 있는 감성과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번역기의 결과물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사전적 정의로 봐도 적절하고 의미 전달도 된다.
하지만 내가 번역한다면 이렇게 옮길 것이다.
“여자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먼저, 우리말에서는 인칭 대명사를 즐겨 쓰지 않는다. 특히 구어체에서는 “그 사람 어땠어?”라고 묻지 “그는 어땠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extremely에 해당하는 “매우”라는 부사 역시 그 자체로 문장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기엔 부족하다. 반면, “더없이”라는 표현은 단어 하나로 아름다움의 절정을 전달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역시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밋밋하다.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로 바꿔보면 어떨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남자가 그려지지 않은가?
번역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원작자가 의도한 정서와 분위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번역기가 범접할 수 없는 인간 번역가의 힘이다. 번역가는 단순히 사전적 정의를 나열하지 않는다. 언어를 넘어 문화적 맥락과 뉘앙스, 그리고 원작자가 숨겨놓은 작은 감정의 결까지도 읽어내고, 이를 다른 언어로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번역가는 이태준이 말한 대로 '언어의 채집자’이자 ‘개조자, 제조자’가 된다. 사전에 갇힌 번역이 아닌,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로 연결되어 있다”
얼마 전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여러 언어로 번역한 50여 명의 번역가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무려 28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의 독자와 만났다. 이처럼 번역가는 단순히 언어를 변환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원작과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번역가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서사를 창조하는 문장가다. 끊어진 다리 앞에서 멈추지 않고 도약하며, 원작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를 연결한다.
표지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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