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다른 것'이고 어디서부터 '틀린 것'일까
"저희도 수거 대상이었네요."
주말에 옛 동료들에게 보낸 메시지다.
나는 전 정부에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거’ 대상이 되었다.
그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일상이 흐트러진 것을 불평했다. 뉴스가 불안하고, 장바구니 물가가 뛰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한가한 생각이었다.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한밤중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끌려가 수용소에 갇혔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나는 ‘틀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한국 사회에서 ‘다름’은 오래도록 환영받지 못했다.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해 온 이곳에서 ‘다른 생각’은 종종 불협화음으로 여겨졌고, ‘눈에 띄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위험 요소였다. 시대가 변했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중식당에서 메뉴를 통일하는 데 익숙하다.
"다 같이 탕수육? 좋지! 근데 부먹이야? 찍먹이야?" 이마저도 의견이 갈리면 난감해진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다름’에 민감할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것’을 경계한다. ‘다른 것’은 생존에 있어 위험 요소였기 때문이다. 무리와 다른 행동을 하면 포식자의 표적이 되거나, 낯선 집단과 마주할 때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다름’을 경계하는 본능이 우리 DNA에 새겨졌고, 현대 사회에서도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배척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물론 사회는 변했다. 우리는 예전처럼 돌을 던지거나 마녀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며 날 선 시선을 보낸다.
우리말에는 유독 ‘다르다’와 ‘틀리다’가 자주 혼용된다. "그건 달라."라고 해야 할 곳에, "그건 틀려."라고 말하는 일이 많다. 이는 단순한 말버릇이 아니라, ‘다르면 틀린 것이다’라는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름’과 ‘틀림’은 같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이분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무조건 틀려야 한다는 식이다.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에 다름이 첨예하게 맞붙고 있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잘못된 사람’으로 단정 짓고, 그들을 교정하거나 도려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모든 ‘다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어야 할까?
우리 모두 한때는 호기심 많고 질문이 끊이지 않는 아이였다. 세상이 궁금했고, 나와 다른 것들을 마주하는 일이 설레는 모험 같았다. 그렇게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점점 한쪽으로 굳어지는 건 아닐까? ‘다름’을 불편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보다 회피하는 법을 익혀버린 건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반대의 연습이 필요하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만으로도, 지금 우리 사회를 뒤덮은 수많은 갈등이 상당 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다름’을 무한히 수용할 수는 없다.
다름과 틀림의 경계
다름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폭력’과 ‘혐오’를 조장하는 다름은 틀림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순간,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위협이 된다.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수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관용’이 아니다.
‘다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틀림’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적 합의다.
그것이 우리가 ‘모난 돌’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표지사진: Unsplash의Scott We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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