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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필사)<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by 루이보스J

일 년여 전, 네가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을 있었을 때, 우리가 부엌에서 보내던 길고 조용한 저녁에, 너는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있지. 김치 한 포기를 도마에 놓고 썰고 있는 내 뒷모습을 향해서.

돌아봤을 때 너는 식탁 앞에 앉아서, 짧은 뒷머리칼 사이로 한손을 넣고, 다른 한 손으로 비스듬히 턱을 고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우리가 피붙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던 저녁. 혼자서 너를. 그토록 방심하고 그토록 내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나온 너를.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어쩐지 신비롭게 느껴지는 너를 보고 있다는 게 지나친 행복이라고 느껴지던 저녁.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어쩐지 신비롭게 느껴지는 너를 보고 있다는 게 지나친 행복이라고 느껴지던

너는 천천히, 정확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사이사이 침묵하며 말했지.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바람이 분다, 가라> 중에서 인주가 정희에게


표지사진: UnsplashMax Ducourn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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