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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존재하다

Read & Write : 고요한 독서와 거친 글 쓰기

by 루이보스J

일주일에 세 번씩 아이를 영어 도서관에

데려다주고 한 시간 뒤에 다시 와야 한다.
굳이 집으로 돌아가기도 애매해서

학원 앞 작은 탁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업무 이메일에 답을 쓰기도 하고, 메모를 끄적이기도 하고, 책을 펼쳐 들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부모들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멍 때리는 부모, 깜빡 조는 부모,
유튜브를 보는 부모, 게임을 하는 부모.

그리고, 늘 책을 읽는 한 아버지가 있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정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으니까.
그저 그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만들어줄 뿐이다.


책을 읽는 모습은 공간을 다독인다.
마치 소음 속에서 작은 고요를 선물하는 것처럼.


드물지만 요즘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본다.
모두들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다고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예전에 했던 수많은 일들이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수렴됐을 뿐이다.

우리는 휴대폰으로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은행일을 보고,검색을 하고, 오락을 즐기고,

책도 읽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휴대폰으로 책을 읽는 풍경이,

종이책을 들고 있는 풍경처럼

평화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책을 읽는 행위에는 '머무름'이 있다.
어떤 장소든,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곳은 조용한 안식처가 된다.
페이지를 넘기는 사각거림이

공기 중에 잔잔한 숨결처럼 녹아든다.

Reading, Berthe Morisot, 1873


Read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 rǣdan에서 왔다.
'해독하다(to interpret), 조언하다(to advise), 숙고하다(to consider)'는 의미다.
단순히 글자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뜻했다.

그래서일까.

어디서든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머무름’의 기운이 느껴진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받아들이고 곱씹는 과정이니까.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공원 벤치에서

책을 펼쳐든 한 사람이 있으면,

그곳은 마치 바쁜 세계 속의 정거장이 된다.

세상이 빠르게 흘러가도,

그 사람만큼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


헤밍웨이는 말했다.

“There is no friend as loyal as a book."
책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

그 말처럼, 책을 읽는다는 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통해

묵묵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읽는 모습이 ‘평화로운 풍경’이라면,

쓰는 모습은 ‘깨어 있는 풍경’이다.

읽는 것이 ‘머무름’이라면,

쓰는 것은 ‘나아감’이다.


쓰는 것은 내 영혼을 읽는 일

Writing Woman by Pierre Bonnard

Write는 원래 ‘새기다, 긁다’라는 뜻이었다.

고대 게르만어 writan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돌이나 나무에 글자를 새기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즉, 쓰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행위'였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일.
머릿속 혼돈을, 질서 있는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


읽는 것은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지만,

쓰는 것은 ‘내 세계를 해독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씨름해야 한다.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이 문장이 내 진짜 마음을 담고 있는가?"


때로는 민망하고, 때로는 막막하고, 때로는 감추고 싶던 생각들이 문장 속에서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쓰기의 힘이다.


조앤 디디온은 말했다.
"I write entirely to find out what I’m thinking."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글을 쓴다.


읽는 것이 고요한 몰입이라면,

쓰는 것은 내면의 격랑이다.


읽을 때 우리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쓸 때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읽는 사람은 평온한 여행자이고,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땅을 파헤치는 탐험가다.


어떤 순간은 여행자가 되고,

어떤 순간은 탐험가가 되는 것.

그것이 읽고 쓰는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표지 사진: UnsplashAaron B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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