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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고 가진 것 없지만 존엄있는 자의 위로

영화 <아노라>를 보고

by 루이보스J

칸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5관왕에 빛나는 영화 <아노라>를 보고

션 베이커 감독 작품

뉴욕의 한 바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애니(아노라)’는 어느 날 영어가 서툰 러시아 남자 고객을 만난다. 알고보니 러시아 재벌의 아들이다. 애니의 매력에 단숨에 빠져든 이반은 그녀에게 일주일간 독점적인 관계를 제안하고, 둘은 라스베이거스로 떠나 화려한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 계약이 끝나는 날, 이반은 충동적으로 청혼을 하고, 애니는 신분 상승의 꿈을 품고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동화 같은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반의 부모가 이 소식을 접하자 분노하며, 미국에 있는 하수인 3인방을 보내 무슨 일이 있어도 즉시 결혼을 무효화하라고 지시한다. 러시아에서 부모들이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철부지 망나니 이반은 애니를 남겨둔 채 홀로 도망친다. 애니는 이반을 찾아 결혼을 지키려 하고, 반면 하수인 3인방은 어떻게든 그를 찾아 혼인 무효를 성사시키려 한다. 각자의 목적을 향한 추격전이 벌어지며, 엉망진창의 대소동이 펼쳐진다.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 인정받지 못하는 삶

아노라는 성 노동자다. 돈을 받고 벌거벗은 몸과 춤사위로 쾌락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노동에는 늘 따가운 시선과 멸시가 따라붙는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나르거나 호텔에서 침대를 정리하는 노동과는 달리, 성 노동은 존중받지 못한다. 보호받을 권리는커녕, 존재 자체가 비난받는다.


사과받지 못하는 잘못, 가진 자들의 일방적 폭력

'돈 없이도 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며 청혼했던 이반은 부모 앞에서는 ‘잠시 여자 끼고 논 게 무슨 큰 잘못이냐’고 변명한다. ‘사랑’이라 믿고 싶었던 애니의 헛된 희망은 그 순간 처참히 무너진다.

이 불장난 같은 결혼의 모든 책임은 오롯이 애니의 몫이다. 시댁은 애니가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사기꾼으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오직 부와 명예에 오점이 남지 않는 것뿐이다. 애니가 법적 대응을 준비하겠다고 나서자, 이반의 엄마는 냉정하게 경고한다.


“가진 것도 얼마 없겠지만, 그마저도 모두 잃게 해주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의 위협은 그렇게 무력한 자를 짓누른다. 결혼은 무효화되고, 애니는 허망하게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사과는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모욕만이 남았을 뿐이다.


힘없고 가진 것 없지만, 존엄이 있는 자의 위로

이 싸늘한 세계 속에서도, 작은 온기는 존재한다. 이고르는 러시아 부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을 지킨다.

애니가 한기 서린 밤거리에 덜덜 떨고 있을 때, 그는 조용히 스카프를 내민다. 이반의 가족이 그녀를 모욕할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물 한 잔을 가져다준다. 결혼을 취소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가 눈을 감자, 그는 조용히 담요를 덮어준다.


“아노라. 석류, 빛, 밝다는 뜻이네.”

“난 애니보다 아노라가 더 좋다.”

그녀를 스트리퍼 ‘애니’가 아닌, 본래 이름인 ‘아노라’로 불러주는 것도 그다.


아노라를 붙잡아주는 따뜻한 온기

이고르는 애니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차 안에서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아노라가 다른 하수인들에게 빼앗겼던 4캐럿짜리 다이아 결혼반지를 돌려준다. 이고르의 친절을 애써 외면하고 있던 아노라는 그제야 그의 존재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보답하려고 한다.


몸으로.


그녀는 ‘고객’이 아닌 ‘이성’과의 관계를 맺는 방법을 모른다. 알았다 해도 잊어버린 듯하다. 그녀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호의를 전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것뿐이었다.

이고르는 작은 몸을 연신 움직이는 아노라를 조용히 멈춰 세운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차창 밖으로 조용히 내리는 눈처럼, 포근하게.


아노라는 그제야 무너져내린다.

아노라는 이고르 품에서 흐느껴 울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아노라>는 차가운 현실을 가감 없이 그려내면서도,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따스함을 놓치지 않는다. 이고르가 아노라에게 건넨 작은 친절들은 세상을 바꿀 만큼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녀가 살아온 삶 속에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것들이라.


토닥 토닥해주고 싶은 그 이름, 아노라.


표지 사진: 사진: UnsplashJessica F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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