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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Nov 12. 2022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누가 결혼을 미화하는가

'그래 봤자 불륜 미화하는 영화 아닌가'


박찬욱 감독의 최신작 <헤어질 결심> 관객 리뷰를 쭉 읽어보다가 이 대목에서 멈추었다.  이런 상상력 빈곤을 마주하게 되면 슬퍼지려 한다. [안나 까레니나], [마담 보바리] 같은 고전부터 <닥터 지바고>, <화양연화> 같은 명작들도 불륜 작품이라고 매도할 기세다.   


우선 용어부터 짚고 넘어가자. ‘불륜'은 억울하다. 제도 밖의 사랑이어서 윤리가 아니라면 사랑 없는 허울뿐인 제도는 과연 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륜'뒤에 세트메뉴처럼 꼭 따라오는 말이 '미화'다.  혼외관계에 빠진 사람들은 성격적 결함이 있고 관계 자체도 피상적일 뿐 아니라 성적 일탈에 불과하다는 가치 판단이 일찌감치 깔려있다.  ‘아름다움'이라는 요소는 그 어느 것도 허용할 수 없다는 완고함이 장착된 표현이다.  


그런데 정작 미화되고 있는 것은 '결혼' 아닌가라는 불온한 생각이 스친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올리는 성대한 결혼식, 꿈결처럼 달콤한 신혼여행, 출산과 육아라는 사랑의 결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긴 세월을 이겨내고 함께 황혼을 맞이하는 이미지들 말이다.


결혼의 사전적 정의는 사실 낭만적인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결혼: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의례이자 계약을 일컫는다.  사회적 구속력을 가지기에 동거나 연인관계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나무 위키)


‘의례', '계약', '사회적 구속력'이 키워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기로 결정하는데 ‘계약’이 웬 말인가?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고 사랑의 유통기한도 제각각인데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서약’은 왜 또 필요한가?  결혼이 단지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계약’과 ‘서약’은 정해진 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묶어두는’ 데 목적이 있다.  너무나 쉽게 결혼이 해체된다면 사회적 기본단위가 흔들리는 것이고 차세대 사회 구성원이 될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위험에 빠지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사랑이 아니어도 결혼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안정, 평판, 자녀 등 부부를 묶어두는 요소들이 촘촘하게 엮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다른 요소들을 모두 다 합한다 해도 사랑이 빠져있다면 그 결혼은 죽은 결혼일 뿐이다.



"사랑은 어느 나이에나 우리를 각성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나는 상대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의 창조자가 되고 상대는 상대대로 나의 창조자가 된다.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고 나 또한 살아있음으로써 상대에게 매일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


-[아직 오지 않는 날들을 위하여]_파스칼 브뤼크네르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응시한다.  서로 따뜻한 눈길을 나누고 세심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나에게 쏟아지는 조명을 한 아름 껴안는 것이다.  나 또한 그에게 존재의 조명을 환하게 밝혀주며 삶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영화 <헤어진 결심>에서 해준(박해일)이 시종일관 응시하는 사람은 아내가 아닌 서래(탕웨이)다.  좋은 것을 먹고 평안히 잠도 잘 잤으면 하고 마음을 쓰는 사람도 아내 정안(이정현)이 아닌 서래다.  그런 해준에 대한 서래의 지독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해준은 아내에게서 응시의 눈을 거둔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심드렁하긴 해도 주기적으로 해준과 잠자리를 나누며 아직 괜찮은 부부라며 주문 아닌 주문을 건다.


결혼이 무가치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느끼는 온기는 인생이 선사하는 가장 큰 기쁨이다.  이따금 '어떻게 이런 축복이 가능할 수 있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을 만큼 행복에 겨울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밋밋한 일상이나 권태 같이 결혼 후 으레 찾아오기 마련인 증상들은 나만은 모두 비껴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결혼 후에도 변함없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헌신하는 부부들도 있다.  다만, 그런 축복받은 (소수의) 부부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지 도덕적인 ‘칭송’의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진 부부에게 결혼에 ‘실패’했다고 쉽게 판단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결혼의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의 결합이 지속되는 토대가 법적 묶임이라는 ‘방부제’라는 데 있다. 방부제가 도포된 순간 사랑은 생명력을 잃고 관습이라는 껍데기만 남는다.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방부제 아래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는 깡그리 잊고 만다.  법적 부부라는 경제 사회적 공동체 또는 자녀 양육의 공동책임자라는 외형만 부퉁 켜 안고 살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제도 안의 사랑이 식으니 제도 밖에서 종종 사랑이 피어나는 일이 어찌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혼외관계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혼외관계는 파괴적인 결과를 몰고 올 수 있다.  지금껏 쌓아 올린 사회적 평판을 일거에 모두 잃어버리는 것뿐 아니라  배우자는 물론이요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혼외관계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배척 및 처단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결혼 '제도' 유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쩐지 씁쓸하다. 우리 사랑이 그렇게 나약한가?


고작 사회적 비난과 처벌이 무서워서 유지되고 있는 제도에 만족하라는 것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모독이다.


결혼이라는 단단한 법적 매듭으로 묶인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고 떠날 자유가 있는데도 서로를 사랑하기에 함께 하는 것,  이것이 ‘결혼’이라는 방부제 밑에 가려진 우리 사랑의 본래 모습 아니었던가?  그 아무리 강력한 제도라도 우리는 온전히 상대를 소유할 수 없을뿐더러 상대의 사랑할 자유를 제한할 수도 없다.  설령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한들 그건 슬픈 일이지 화가 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만 사랑하기로 한 ‘계약’을 어겼다고 따지는 일은 너무나 초라하지 않은가?



Let there be spaces in your togetherness

and let the winds of the heavens dance between you.  


Love one aonther but make not a bond of love.

Let it rather be a moving sea between the shores of your souls.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그대들 영혼의 나라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칼릴 지브란


결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 배우자가 여전히 언제든 다른 누군가를 응시하고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의 존재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결혼 전에 서로를 갈망했던 두 사람 간의 ‘거리’를 다시 회복한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은 허상이다. 결혼 후에도 독자적인 취향과 관점을 견지한 독립적인 개체로서 따로 존재할 때 두 사람 간의 건강한 긴장이 유지된다.  


배우자는 단지 나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붙박이처럼 나만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의 실현은 파뿌리 될 때까지 결혼이라는 외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응시하고 아껴주는 것이다.


어떤 관습이나 제도도 사랑, 그 본연의 고귀한 가치보다 앞설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혼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를 알 때만이 사랑이 깃든 행복한 결혼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된다.


결혼을 제도로서 미화하는 자가 바로 결혼을 죽이는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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