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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쉰 하루에는 흔적이 없다.

(휴식에 대해) 사진도, 성과도, 계획표도 없는 하루

by 루이보스J

주말은 쉬는 날이라고들 하지만, 워킹맘에겐 사정이 조금 다르다.
하루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다. 아이들 아침을 차리고, 여가 활동을 짜고, 간식이며 외출이며…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어 있다.
사실상, 주말은 또 다른 평일이다. 다만 일 대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평일.

오늘 오전엔 아이들과 <쥬라기 월드:새로운 시작> 보고 왔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오락 영화였지만, 아이들이 재밌었다고 하니 그것으로 족하다. 오후엔 아이들이 조용해진 틈을 타 소파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 짧은 졸음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아, 내 몸과 마음이 참 오래전부터 쉬고 싶어 했구나.

쉼이란 단지 누워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삶을 잠시 가만히 안아주는 일이며,
나를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 조용한 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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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우리는 쉼을 자주 '멈춤'이라 여긴다. 하지만 몸은 멈추기 보다 천천히 흐를때 회복된다.

기계가 아닌 식물처럼 매일 조용히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햇살을 맞아야 살아나는 정원처럼 말이다.


고요한 스트레칭, 미지근한 욕조 속의 느릿한 호흡, 늦은 오후의 볕 아래 스르륵 스며드는 낮잠..

무엇이든 좋다.


-마음

몸은 가만히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달린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생각들, 해야 할 일들, 어쩌다 본 뉴스 한 조각에 불쑥 밀려드는 감정.
스마트폰은 내려놓았지만, 내 안의 ‘생각 피드’는 여전히 새로고침 중이다.

그래서 잠시, 마음의 전원을 꺼본다.
의미 없는 듯한 구름의 흐름, 바람 부는 소리, 손글씨로 써 내려간 오늘의 감상.
그 무의미함이 마음을 정화한다.
우리가 진짜로 필요한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관계

사람은 연결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연결이 언제나 선물이 되는 건 아니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다. 말없이, 설명 없이, 잠시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

메시지에 바로 답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이 꼭 비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다.
잘 쉰다는 건 누군가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워지는 일일지 모른다.


-의미

쉬는 날에도 우리는 자꾸 묻는다.

“이 시간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었지?”
“그래도 뭐 하나는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진짜 쉼은 의미 없음 속에 숨어 있다.
그 시간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괜찮다.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 조각 과일을 천천히 씹는 시간.

그게 전부이면서, 충분할 때가 있다.


-존재

'충분히 잘하고 있는지'

'괜찮은 사람인지'

'더 나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와 같은 질문도
잠시 접어두자.

지금 이대로 괜찮은 상태로 존재해 보는 것.

그건 마치 수영장에서 물에 몸을 맡기는 일과 비슷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라앉지 않는다.
가장 가볍고 가장 깊은 상태.
그게 어쩌면 쉼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잘 쉰 하루는 흔적이 없다.

사진도 없고, 성과도 없고, 계획표에 흔적도 없다.


그런데

그런 날이, 삶을 견디게 해준다.


표지 사진: UnsplashSincerely Media

본문 사진: 사진: UnsplashAleksandar Cvetano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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