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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 있게 사라진다는 것

영화 더 파더(The Father)가 보여준 소멸의 리허설

by 루이보스J

영화를 보고 나서 꺼이꺼이 울어본 적이 몇 번 있다.


앨런 파큘라 감독의 <소피의 선택>,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것도 모른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가 떠오른다.


대개 그렇듯, 나도 영화 평론가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해석은 참고 사항일 뿐이다.


다만, 유독 신뢰하는 두 평론가가 있다.


이동진과 박평식


<The Father>는 명배우 앤서니 홉킨스의 출연작이라 처음부터 관심이 갔지만, 이동진의 “보고 울었다”는 말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역시, 나도 울었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 연출

혼란 속으로 들어가는 연출

<The Father>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한 노인,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그의 머릿속으로 끌어들인다.

시간과 장소, 사람의 얼굴이 뒤섞이고 변하며, 우리는 그의 혼란을 그대로 체험한다.


집 구조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딸 앤의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 순간 우리는 “내가 뭘 놓쳤나?” 하고 스스로를 의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 아니라,

앤서니가 바라보는 세계의 붕괴다.


그는 오래된 손목시계를 집착적으로 찾는다.

그 시계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사라져 가는 자아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끈이었다.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아버지를 돌본다.

그녀의 표정에는 억눌린 한숨과 지친 눈빛이 겹쳐 있다.

돌봄은 순간의 헌신이 아니라,

매일 무너져 내리는 사람을 붙잡는 고행이다.


앤서니는 여전히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지만, 점점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간병인 도움은 필요 없어. 나 혼자 다 할 수 있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다음 장면에서,

그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방 한가운데 서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요?”

마침내, 앤서니가 무너져 내리듯 묻는다.


그의 목소리는 노인이 아니라,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다.

갑자기 바람과 비에 나뭇잎이 젖을까 걱정하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인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라 ‘아이’였다.

간병인은 조용히 그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맑은 날은 오래가지 않아요. 날이 좋을 때 산책해야죠.”

짧지만 깊은 그 한마디가 말해준다.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살아있을 때 진정으로 살아야 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치매에 걸린 노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마지막 불씨를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다.


소멸의 리허설

<The Father>를 보고 나니,

삶은 끊임없는 습득이 아니라, 서서히 내려놓는 리허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땐 이름을 배우고, 사물의 용도를 익히고,

세상을 점점 넓혀 가지만,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이 하나씩 지워진다.


먼저 잊히는 건 대개 타인의 이름과 나와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다음은 가족, 그리고 내 집주소, 직업, 취향,

마침내 ‘나’라는 이름 자체가 흐려진다.


언젠가 찾아올 그 맑은 날의 끝,

우리는 무엇을 들고, 무엇을 놓은 채

사라질 수 있을까.


표지사진: Unsplash Ritam Baish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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