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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미식가, 하루 한 순간을 음미하는 법

(통역일기) 더 깊게, 더 느리게, 더 충만하게 존재하기

by 루이보스J


지난주, ‘사찰음식과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한 국제 세미나에서 동시통역을 맡았다.


(참고기사)

한국 사찰음식, 최고의 요리학교 CIA에서도 만날까 - 경향신문

마이크 너머로 오가는 언어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통역이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을.


이번에는 아주 멀리, 과거와 철학 속으로 다녀왔다.


연사 중 한 교수는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 문인화가들이 남긴 책 속 음식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림과 글 속에 담긴 요리법, 식재료, 그리고 그것이 품은 삶의 태도까지.


그중에서도 청나라 말기 문인화가 쉐 바오천(Xue Baochen)이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소식설략(素食說略)』이라는 책에서, 단순히 육식을 줄이자는 주장을 넘어 삶을 음미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소식설략>(채식에 대한 간략한 책), 쉐 바오천

책의 목표는 명확했다. 채식을 단순히 세련된 취향이나 생활방식의 상징으로 추상화하지 않고, 사람들의 식습관과 생각을 바꾸어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었다. 내 마음을 끈 것은 동물의 고통에도 깊은 연민을 느꼈던 그의 감수성뿐 만 아니라 그의 진정한 ‘미식가적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이었다.


쉐 바오천은 공자의 <중용>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진정한 맛을 아는 이는 드물다."
"채식이야말로 진정한 미식가를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고기를 먹으며 무뎌진 미각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훨씬 더 섬세하고 무한한 맛의 스펙트럼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대식가와 미식가를 삶의 태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식가는 단순히 더 많이, 더 빨리 경험하려는 삶의 방식이다. 정보, 사람, 일, 경험을 빠르게 소비하며 배를 채우듯 살아간다. 미식가는 다르다. 하루 한 순간에도 마음을 담고, 삶의 향과 질감, 사람과 사건 하나하나가 가진 이야기를 음미하며 살아간다. 먹는 행위뿐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솔직히 나는 요리에 소질도, 취미도 없다. 나름 건강식을 챙긴다고 생각하면서도, 바쁠 땐 음식조차 ‘에너지’로만 소비한다. 사실, 이 심포지엄을 통역하는 날도 식사 때를 놓쳐서 쉬는 시간에 간단히 고구마와 우유로 식사를 때웠다.


몇 년째 ‘덜어내기’를 실천하며 마음속으로는 미식가적 삶을 꿈꾸었지만, 여전히 대식가적 습관은 남아 있다. 더 많이 보고,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빨리 판단하려는 습관 말이다.


다행인 건, 이렇게 우연히 쉐 바오천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하루 한 끼를 먹듯, 하루의 순간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살아보라고 권해주는 시간 여행자 말이다.


오늘부터라도 미식가적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경험을 느끼고, 시간을 음미하리라. 쉐 바오천이 말하듯, 한 숟가락의 음식이 인생을 가르치듯, 한 순간의 삶이 나를 가르치도록.


대식가적 본능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미식가적 시선으로 하루를 바라보는 순간, 삶은 한층 선명하고 풍부해진다. 한 끼 사찰음식처럼 천천히, 하지만 온전하게.


음식뿐 아니라 하루, 사람, 경험까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깊게, 더 느리게, 그러나 더 충만하게.


마침, 템플스테이를 다녀온 주말이다. 늘 갈때마다 몸마 마음이 충만해지는 망경산사 :)


본문 사진: UnsplashKevin McCut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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