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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Nov 27. 2022

'다름'이 '틀림'이 되는 폭력

제주 4.3을 공부하며 

배우들이 새 작품에 들어갈 때면 대본을 외우고 맡은 역할에 대한 연구도 하듯이, 통역사들도 새로운 일을 받으면 한동안 그 주제에 빠져 산다.  참고자료를 공부하며 배경지식도 쌓고 자주 나오는 용어도 정리해서 바로 대응어가 나오도록 입에 붙이는 준비과정이다.  


횡포, 수탈, 시위, 진상규명, 발포, 탄압, 저항, 무장대, 토벌대, 진압, 방화, 죽창, 반공 우익, 좌익 색출..


요즘 입에 붙이려고 정리 중인 용어다.  15년 통역사 경력 중에 비슷한 용어를 준비했던 때가 있었다. 미얀마 사태였다.  그때도 준비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유독 더 힘들다.  진압 양상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악한다데가 자꾸 감정이입이 된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푸른 밤 우리 제주에서 일어난 비극인 것을. 


그렇다.  나는 요즘 얼마 후 있을 제주 4.3 관련 심포지엄 통역을 준비 중이다.  제주 4.3이라면 오래전에 영화 <지슬>을 보고 가슴 아파했던 기억만 있을 뿐, 전후 복잡다단했던 역사적 배경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야 참고자료와 관련 강연 등 영상들을 찾아보며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처연함이 느껴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주 4.3 관련 강연 영상에 달린 댓글 반응이었다.   대다수가 과도한 진압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키웠다고 지적하면서도 무고한 양민과 좌익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나와 이념이 다른) 좌익은 참혹하게 학살되어 마땅하다는 논리다.  좌와 우 중 어느 쪽이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느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좌든 우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무참히 짓밟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을 넘어 주저 없이 생명권까지 잔혹하게 앗아가는 비합리성이다.  


"귀신이 뭐가 무섭니. 사람이 무서운 거야."  


어릴 때 귀신 이야기를 듣고, 귀신이 너무 무섭다고 이야기했더니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제주 4.3을 공부하며 엄마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잔악무도한 비합리성이 몸서리 쳐지게 두렵다.  해방 전후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던 특수한 시점이라는 점은 모르는바 아니다.   그런데 과연 ‘다름’이 ‘틀림’이 되는 폭력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을까?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으로 용인하지 못할까? 너무 순진한 생각일지 몰라도,  다름을 그저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훈련만 되어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갈등은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실제로 ‘다르다’와 ‘틀리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틀리는 언어 습관 중에 하나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르면’ ‘틀리다’고 받아들이는 무의식의 표현이고 좀 더 확장해보면 ‘단일민족’의 비애라는 생각까지 든다. 

주변에 모두 나와 같은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 어릴 때부터 동질성에 가치를 둔 교육을 받다 보니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는 능력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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