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꺼지지 않는 아날로그의 속삭임

라디오 예찬, 우연과 조용한 공존이 주는 위안을 찾아서

by 루이보스J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79년, 버글스(The Buggles)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구세대를 몰아낼 것이라 예언했다.

그러나 2025년, 우리는 여전히 라디오를 켠다.


AI가 내 취향을 분석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주는 시대다. 손끝 하나로 1억 곡을 검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3초 만에 스킵한다. 완벽한 통제, 무한한 선택. 그런데도 우리는 다이얼을 돌린다.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라디오는 단지 음악을 틀어주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이 주는 여백의 선물

플레이리스트는 내가 '이미 아는 나'를 재생한다. 반면 라디오는 내가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낸다.

엊그제 저녁, 라디오에서 〈일 포스티노〉 OST가 흘러나왔다.


https://youtu.be/P4CLTHqGYdI

<일 포스트노 메인 테마곡> 존 윌리엄스 연주

그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에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꽤 오래전 이 곡에 흠뻑 빠져있던 나날이 있었다. 그때의 꿈과 감성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찾아서 듣는 음악은 준비된 마음으로 듣지만, 불현듯 찾아온 음악은 무방비 상태의 나를 덮친다. 라디오의 힘은 이 '불시착'에 있다.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 감상은 능동적이다. 선택하고, 평가하고, 큐레이션 한다. 그러나 라디오는 수동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맡기는' 행위다. 오늘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곡일 수도, 처음 듣는 곡일 수도 있다. 선곡을 믿고 따라간다. 이 신뢰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휴식이다. 선택지가 무한할 때, 선택은 피로가 된다.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라는 말이 있다. 하루 종일 수백 가지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사치다.


라디오를 켜면 시간이 느려진다. 채널에 따라 광고도 들어야 하고, 날씨 예보도 지나가고, DJ의 소소한 이야기도 흐른다. 이 모든 '비효율'이 오히려 숨 쉴 틈을 만든다. 알고리즘은 단 1초의 침묵도 용납하지 않지만, 라디오에는 여백이 있다.

#조용한 공존

스트리밍 서비스는 철저히 개인적이다. 나의 라이브러리, 나의 재생목록, 나만을 위한 추천. 그러나 라디오를 켠다는 것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같은 주파수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청취자가 보낸 사연이 소개될 때마다 그 익명의 목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요."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중에 듣고 있습니다."

"아직 말 못 한 사람에게 이 곡을 보냅니다".


각자의 밤, 각자의 사연. 하지만 같은 전파 위에서 우리는 잠시 연결된다.

SNS는 '좋아요'로 연결되지만, 라디오는 침묵으로 연결된다.

댓글을 달 필요도, 반응할 의무도 없다. 그저 듣는다.


#시간표가 있는 세상

넷플릭스는 내가 원할 때 본다. 유튜브는 내가 고른다. 모든 콘텐츠가 온디맨드(on-demand)가 된 세상에서, 라디오만큼은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시작한다.〈세상의 모든 음악〉은 매일 저녁 6시, 〈당신의 밤과 음악〉은 밤 10시. 20년, 40년 넘게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방송된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든, 익숙한 시그널 음악이 들리는 순간 '아, 이제 저녁이구나', '하루가 끝나가는구나' 감각한다.


변화가 미덕인 시대다. 더 새롭게, 더 빠르게, 더 파괴적으로. 그러나 모든 것이 유동적일 때, 우리는 고정점을 필요로 한다. 라디오는 그 고정점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매일 같은 시간,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존재말이다.


#목소리의 온도

텍스트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오직 '목소리'만 있는 매체. DJ의 목소리에는 그날의 날씨가 배어 있고, 피로가 묻어 있고, 때로는 미소가 들린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단순한 인사말이지만, 그 한마디에 하루를 견딘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다.


라디오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매체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다.


오늘은 회의가 늦게 끝나 6시 프로그램 <세상의 모든 음악>을 놓쳤다.

하지만 괜찮다. 밤 10시 <당신의 밤과 음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 1학년, 서울로 유학 와서 이모네 집에 얹혀살던 시절. 군대 간 사촌 오빠의 빈 방을 쓰게 됐다.

낯선 도시, 낯선 방에서 처음 들었던 그 시그널 음악.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멜로디는 한 음표도 바뀌지 않았다.

그 따뜻한 안도감이란...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이고, 더 개인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함께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라디오가 살아남은 이유다.

그리고 라디오가 사라지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표지 사진: UnsplashNacho Carretero Molero

본문 사진: UnsplashIndra Proj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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