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보스J Mar 27. 2023

일이 끝난 후 진짜 삶이 시작된다.

프랑스의 연금개혁 반대 시위를 보며 짚어보는 일의 의미

얼마 전 중요한 전화를 놓쳤다.  가끔씩 일을 주시는 선배님이었다.  전화를 주셨는데 안 받으니 카톡을 남기셨다.  해외출장건인데 일정이 가능하냐고 물으셨다가 한 시간 정도 답이 없으니 급한 건이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저녁 약속 중이었던 터라 전화를 무음으로 해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래서 프리랜서들은 샤워하러 갈 때조차 전화기를 들고 간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뒤늦게 보니 일정도 가능했을 뿐 아니라 가까운 친구가 해외근무로 나가 있는 지역이었다.  일도 하고 한동안 보지 못한 친구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가버렸다.


쓰.라.리다.


속절없이 놓쳐버린 일의 주제는 뭐였을까?  준비하면서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준비한 노트를 복습했을 시간,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친구를 만났을 모습도 그려보았다.  


내 일이 좋다. 가능한 오래 하고 싶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언젠가는 끝이 오고야 만다.  ‘이 일도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60대, 70대까지도하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뉴욕타임스 팟캐스트 더 데일리(The Daily)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우리는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We don’t want to live just working)

“진짜 인생은 일이 끝날 때 시작하죠” (A real life begins when work ends)


그날 방송은 다름 아닌 프랑스의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시위를 다루고 있었다. (France’s Battle Over Retirement, the Daily 3월 16 일 편) 일을 통해 삶이 풍요해지고 향상된다(Life is enriched and enhanced by work)고 믿는 미국인들과 달리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에게는 진짜 삶은 은퇴 후에 시작한다 ( A real life kicks in once you retire)는 신념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뉴욕타임스 파리 특파원은 설명한다.


프랑스인들에게 진짜 삶이란 일이 아니라 우정, 사랑, 공동체, 놀이, 노을 음미하기, 여행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자주 느끼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미국의 방식에 가깝다.  우리 사회에서 ‘바쁨’은 성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지라 '한가함'을 한가로이 자랑할 수 없다. 특히 프리랜서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리라.  나부터도 연초면 어김없이 동료 통역사들에게 ‘올해도 일복 터지세요’라고 덕담을 하곤 한다. 왜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해 안달일까? 심적으로는 일중독 미국인들보다 도도하고 시크한 프랑스인들을 닮고 싶은데 말이다.


 나에게 일은 어떤 의미일까?  스스로 생각회로를 돌려본다.


더 많은 일은 곧 돈이다.->더 많은 돈으로 뭘 하고 싶은데?->혼자 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물질적 시간적 여유를 즐겨야지->일 하느라 바쁘면서 언제 시간을 내? -> 일 할 수 있을 때 벌어둬야 나중에 여유를 즐기지?-> 그 나중은 대체 언제 오는데?


반드시 돈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보다야 군색해지겠지만 생계라면 배우자 수입으로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결혼 제도 안에서도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중시하는 터라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만큼은 최대한 피하거나 늦추고 싶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에서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다.   그렇다 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회에 쓸모 있는 존재로서의 인정욕구를 일을 통해 상당 부분 채우고 있다.


결국 일의 의미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돈벌이를 통한 물질적 시간적 여유의 확보

2)    정신적/경제적 독립의 토대

3)    인정욕구 충족과 자기 효능감(self-efficacy) 확인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척도로서의 일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하나하나 반박이 가능해 보인다.  돈벌이를 해야 물질적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당근으로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해야 할 만큼 물건은 이미 차고 넘친다.  시간?  보장되지 않는 미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시간을 희생시킨다고? 소중한 사람들과 지금 당. 장. 현재의 달콤함을 마음껏 들이키면 될 일이다.  결혼 제도 안에서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나름의 신념에서도 일말의 씁쓸함을 발견한다.  경제적으로 ‘내 몫’을 해야만 동등한 위치, 동등한 발언권을 갖게 된다는 전제말이다.  어쩌면 결혼에서의 '내 몫'은 전업주부들이 더 톡톡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업주부의 가사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굳이 환산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집(house)을 따뜻한 안식처로서의 공간인 홈(home)으로 가꾸고 관리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닐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해도 해도 끊이지 않는 집안일을 매일 뚝딱 해내는 모든 엄마들을 존경한다.) 바깥일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는 내가 왠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통역사로서의 OOO가 빠지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일이 끝나는 순간에 진짜 삶이 시작하는 프랑스 기준으로 내 삶은 앙상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해질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지금부터 미리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찌감치 밥벌이의 지겨움을 쓰면서 밥벌이는 하는 경지에 다다른 김훈 선생님이 부럽기 그지없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 방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일했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중에서

#일의 의미#프랑스#연금개혁#시위#존엄#은퇴


커버 사진: UnsplashMarvin Meyer





작가의 이전글 복수, 때를 기다리는 잔혹 예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