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안정된 일과를 확보했다면 다음은 우선순위다. 중요하지 않은 일 백가지를 처리하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현시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글쓰기다. 아무리 바빠도 단 한 문단이라도 글을 쓰자고 결심한 지 두 달이 넘었다. 그 사이 어떤 날들은 한 문장도 못쓰고 지나친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밤에 졸음이 몰려와도 그날 목표량보다 몇 배 많은 글을 쏟아냈다. 어떤 날은 일찍 일어나 글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간의 시행착오로 깨달은 것은 역시나 중요한 일은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더라도 덜 중요하지만 다급한 일들이 쓰나미처럼 들이닥치면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중요한 일은 무조건 오전 중에 해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운동도 오전 중에 마치려고 한다. 글쓰기와 운동을 아침 중에 마무리하고 나면 하루 중 나머지 일과는 덤으로 선물 받은 것처럼 가뿐하다.
물론 개인의 체질이나 성향, 습관, 일과를 보내는 방식에 따라 아침이 최상의 시간인 사람도 있고, 점심이나 늦은 저녁이나 밤에 컨디션이 최고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컨디션이 가장 좋은 시간 대는 그에 상응하게 가장 많은 집중을 요하는 일을 하고, 공과금 납부와 같이 잡다한 일 처리는 점심 먹고 졸음이 몰려오거나 지루하거나 집중이 잘 안 되는 시간에 한꺼번에 처리한다.
가장 큰 시간도둑은 아마도 우리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온갖 불필요한 정보일 것이다. 광고, 카톡 알림은 끊이지 않고 심심해서 무심결에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한참 정신이 팔리기도 한다. 영화 한 편 보자면 넷플릭스, 왓챠, 애플 TV, 쿠팡 플레이, 디즈니 플러스까지 순회하며 고르고 고르다가 영화를 보기도 전에 먼저 지쳐버리기도 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투 머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넘치는 엔터테인먼트
그중에서도 엔터테인먼트의 과잉이 가장 두드러진다. ‘놀이’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 고유의 활동이다. ‘놀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즐기는 ‘놀이’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시각 위주다. 특히나 잘 짜여진 시각 콘텐츠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주변에 책벌레로 통했던 친구들도 유튜브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읽으면서 정보를 습득했던 방식이 보는 ‘보는 방식’으로 이행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와 같은 영상매체로부터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 온갖 ‘덕후’ 콘텐츠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마음만 먹으면 유명 대학 과정도 혼자서 마스터할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콘텐츠도 수두룩하다. 내 머릿속을 스캔이라도 한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취향저격’하는 맞춤 영상도 계속 업데이트된다. 하지만 어떤 콘텐츠를 공략하여 어떻게 활용하여 어떤 목표에 도달할 것인지 계획을 짜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단편적인 과잉 정보에 불과하다. ‘어떻게 매사에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움직이느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여가 시간이 넘치는 부류가 아니라면 말이다. 내 경우 수면시간, 생활유지에 드는 시간, 육아에 쏟는 시간, 근무시간을 빼고 나면 오롯이 내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불과 서너 시간도 되지 않는다. 생계형, 워킹맘 통역사로서 나는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할 처지가 못된다.
게다가 하루 동안 감각기관을 통해 흡수하는 모든 것들은 정신의 자양분이다. 피와 살을 만드는 음식을 가려 먹듯 내가 보고 듣는 즐기는 콘텐츠는 얼마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유튜브를 열어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내 니즈를 이해하고 싶다.
바쁘게 돌아간 하루를 뒤로 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명상음악을 찾고 있나?
주말에 볼 영화를 고르려고 최신 영화 리뷰를 확인하려는 건가?
오늘 회의 중에 NFT가 등장했는데 더 자세히 공부해볼까?
유튜브나, 인터넷이나, 스트리밍 서비스에 접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스스로 묻는다. “뭐가 필요한데?” 이렇게 자문해보면 처음에 무슨 이유로 접속했는지 기억도 못하고 시간을 줄줄 흘리는 일은 피하게 된다. 옆길로 새는 일은 역시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소셜미디어
또 다른 커다란 시간 도둑은 바로 소셜 미디어다. 2000년대 초 싸이월드가 등장은 대단했다. 갑자기 싸이월드를 하는 사람들과 하지 않은 사람들로 홍해 갈리듯 갈렸다. 순식간에 싸이월드 파가 수적으로 우세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싸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극소수 희귀종이 되어버렸다. 처음 싸이를 시작하며 느끼던 흥분감이 아직도 떠오른다. 아바타를 만들고 공간을 꾸미고 배경음악을 깐다. 일촌신청이 오면 설렌다. 일촌이 써준 나와의 사이 멘트가 맘에 들면 그 친구가 한층 더 좋아진다. 어떤 사진에 어떤 글을 써서 올릴까 고민한다. 일촌들이 올린 화려한 일상이나 멋진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다른 친구들한테는 '예쁘다', '멋지다'라는 코멘트를 달고는 나한테는 댓글을 달지 않는 친구한테는 괜스레 심통이 나기도 한다. 친한 일촌들과는 서로 칭찬을 주고받고, 사진을 퍼가며 친분을 과시한다. 그동안 페이스북을 거쳐 인스타그램으로 플랫폼만 바뀌었을 뿐 소셜미디어에서의 양상이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점검해보기로 했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계정은 있지만 가끔 ‘눈팅’만 할 뿐 실제로 활용하고 있는 플랫폼은 페이스북이다. 주로 책이나 영화 감상을 올리거나 나와 가족 근황을 공유하기도 한다. 가족사진 등 사생활이 드러나는 포스팅은 페이스북 친구 중에서도 가까운 사람들, 그 외 포스팅은 친구에게만 공개하고 전체 공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왜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감상을 페이스북에 올릴까? 어떤 포스팅이든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여기 존재하고 있어요.
-그리고 보다시피 잘 지내고 있어요.
-토끼같이 예쁜 아이들도 있어요.
-남편과의 사이도 그럭저럭 괜찮아요.
-먹고살기 바쁜 것만은 아니에요. 영화도 보고 책도 있고 있어요. 아직은 낭만을 잃지 않았어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닐 정도는 여유는 있어요.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결국 ‘인정’ 받고 싶어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정 욕구의 표현이므로 나 스스로를 ‘대체 왜 그래?’라며 다그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소셜미디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있지는 못하고 있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었다.
취향이든 사생활이든 일단 공유하고 나면 어찌 된 일인지 음악, 책을 통해 느낀 감흥이나 사진 한 장에 담긴 특별한 순간의 본래 향기가 증발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올리고 나서도 좋아요나 댓글로 나타나는 호응도에도 완전히 무심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습기 그지없다.
사실 내 페이스북 친구는 180명도 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와의 소통은 처음부터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모르는 사람들이 신청한 친구 요청을 수락해 친구 수를 늘릴 생각도 없다. 180명 중에서도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의 친구 또는 지인의 지인이라 연결된 사람을 제외하고 나면 사적인 취향이나 일상을 공유하는 대상은 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이 내 포스팅의 독자로 딱히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원 때 페이스북을 시작한지라 우선 대학원 친구들이 많다. 해외에 사는 친구들과 지인들,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면서 일자리를 옮길 때마다 회사 사람들이 추가되었다. 그간 거쳤던 사기업, 공기업의 간부들이나 직원들, 대통령비서실 해외언론비서관실에서 일할 때 알게 된 기자들, 그리고 직접 아는 사람들이 아닌 그들의 지인들이 다다. 그마저도 인스타그램으로 많이들 넘어가서 페이스북 친구 가운데 실제 활동하는 사람들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그 한 줌 안 되는 사람들이 마치 내가 서야 할 무대라도 된 듯 착각했던 것이다. 물론 소셜미디어를 아주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잘 활용하여 인생이 완전히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차고 넘친다.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에게 소셜미디어는 최고의 플랫폼이다. 반면 나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목적도 명확지 않았으며, 공유하는 내용도 중구난방 제각각이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짧은 감상, 끄적끄적해본 짧은 글들은 아무런 에너지도 발산하지 못한 채 휘발되고 말았다. 결국은 자랑거리에 불과한 사생활 노출은 잠깐의 짜릿함을 안겨줄지는 몰라도 이내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에 빠지게 했다.
인맥 유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로 발전한 경우는 거의 없다.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소셜미디어에서 만나서 결혼한 경우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로 꼽히는 몇몇 친구들과는 심지어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사이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멋져 보일 필요가 없는 사이다. 그 친구들과는 오히려 소셜미디어에서 칭찬을 주고받으면 오글거린다. 내게 소셜미디어는 인간관계 유지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 친한 친구들과는 이미 메신저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
영감 얻으려고?
페이스북 친구 몇몇이나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분들 대다수는 글도 잘 쓰시고 색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기도 해서 그분들의 포스팅은 꽤 볼만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중 일부는 글을 쉬고 있어서 페이스북 매력이 크게 줄었다. 더욱이 글 좀 쓴다는 분들의 포스팅을 읽다 보면 그들의 화려한 필력에 주눅이 든 나머지 꽤 오랫동안 글쓰기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생각해보면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시욕?
적당한 자기 홍보성 포스팅은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지나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시기와 질투를 부를 수도 있다. 크고 작은 성취를 떠벌리지 않고 혼자 오롯이 음미할 때의 달콤함을 즐겨보면 어떨까. 고요하고 충만한 삶을 누리는 건 모두들 ‘나 좀 봐줘요’를 외치고 있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사치 인지도 모르겠다.
소셜미디어에 대한 회의감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쉰 적도 있고 쉬는 동안에는 확실히 삶이 더 정돈되고 온전해짐을 느꼈다. 분주한 소란함도 멈추었다. 주변을 떠다니던 먼지가 가라앉은 기분이랄까. 그런데 왜 매번 다시 이 소란하고 산만한 곳으로 돌아왔을까? 가장 최근의 예를 보자. 몇 개월간 한 번도 클릭하지 않았던 페이스북에 돌아온 건 대선 직전이었다. 박빙의 차이로 승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선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와 뜻이 비슷한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며 불안을 떨쳐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는지 점검해봤다.
1) 정치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터질 때 나와 동조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안심하고 내가 맞다는 확신을 굳힌다.
2) 집중을 요하는 일을 하다가 잘 안 풀리면 피난처를 찾아 로그인한다. 집요하게 매달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소셜미디어에 접속해서 스크롤 다운하며 재밌는 포스팅을 보는 일이 훨씬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3) 뭔가 포스팅을 올리고 나면 자꾸 들어가 보게 된다. 알림이 오면 산만해져서 꺼뒀더니 오히려 더 자주 들어가서 놓친 댓글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특정한 사회 정치적인 이슈가 있을 때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면 나와 의견이 비슷한 포스팅이 대다수다. 내 페이스북 친구들은 처음부터 나와 가깝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지인들이니 상당수는 애초부터 나와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그들이 올린 글만 보고 일반 여론이 이렇구나 지레짐작하면 커다란 오류에 빠지고 만다. 심지어 페이스북은 내가 ‘좋아요’를 누른 포스팅 분석을 통해 이미 내 성향을 모두 파악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피드를 더 노출시킨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보고 있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세계의 편집본인 셈이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주로 소통함으로써 나와 다른 견해는 불신하고 내 의견만 증폭, 강화되는 ‘반향실(Eco Chamber)’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때는 ‘합리적인’ 사람들로 분류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지나치게 보수화되거나 반대로 왼쪽으로 급선회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즐거움 거리나 유용한 정보를 찾아 들어가는 소셜미디어는 아이러니하게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소셜미디어를 이용자들은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우울감을 많이 느낀다는 연구결과는 놀랍지도 않다. 우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환상적인 휴가나 화려한 일상, 또는 만인의 칭송을 받는 눈부신 성취를 자랑하는 포스팅을 보면 내 인생이 남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실 소셜미디어의 상당 부분은 ‘자랑거리’로 가득하다. 얼마 전에는 질투나 시샘의 악순환을 위트 있게 노래로 만든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온라인 자랑거리가 얼마나 팽배한 지 트위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랑’ 포스팅을 모아 분류하고 해설을 한 [Humblebrag: The Art of False Modesty(겸손 자랑질, 거짓 겸손의 기술)] (Harris Wittels 저) 책도 나왔다. (번역본은 안 나온 모양이다) 이 저자는 겸손한 척하면서 자랑한다는 말로 ‘Humble+Bra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 책에 나온 ‘겸손한 척 자랑’의 예는 아래와 같다.
-유명인과의 인맥, 일등석으로 여행하는 고충(?), 섹시한 건 괴로워, 모델이어서 힘들어, 부자여서 힘들어, 자선을 베푸는 건 힘들어, 나는 너무 말랐어, 작가는 힘들어, 인정받으니 머쓱하네, 등등
정곡을 찌른 지적에 해학이 담긴 해설까지, 보는 내내 웃게 만드는 위트 넘치는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제껏 나도 자랑을 꽤 많이 했음을 깨달았다.
책 번역했다고, 마이클 샌델이나 제레미 다이아몬드같이 좋아하는 저자들 통역했다고, 누구누구 유명인을 만났다고, 멋진 곳에서 휴가 중이라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고 올린 글이나 잘 나온 사진들 모두 자랑질이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있다. [Humblebrag]에 따르면 자랑이 아닌 척 자랑하는 경우가 대놓고 자랑하는 경우보다 더 큰 거부감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겸손한 척하면서 자랑을 늘어놓으면 사람들은 속임을 당한 것과 유사한 기분을 느끼는 듯하다.
소셜미디어를 완전히 끊겠다는 말은 아니다. 소셜미디어도 스마트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구다. 소셜미디어가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장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유용한 플랫폼이다. 소셜미디어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필요 이상의 신경을 빼앗겨 주객이 전도되는 기분이 달갑지 않을 뿐이다. 주도권을 유지하면서 본래 쓰임대로 활용만 한다면 훌륭한 도구다. 소셜미디어를 내가 어떻게 쓰고 있는지 분석하면서 어떤 목적으로 활용할지,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또 한 가지,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것은 모두 휘발되고 만나는 점이다. 전부터 소셜미디어라는 도구를 내가 어떻게 쓰고 있는지 분석해보자 생각만 했다. 이번엔 노트를 꺼내 적어봤다. 엉킨 실타래를 다 풀지 못해도 실타래를 밖으로 꺼내놓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뉴스
“뉴스는 건강을 해치고 공포와 공격성을 키우고 창의성과 깊게 사고하는 것을 방해함으로 완전히 끊어야 한다”
2013년 4월 영국 신문 가 디어진에 실린 <뉴스는 해롭다. 끊으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News is bad for you-and giving up reading it will make your happier> 기사의 요지다.
(기사 원문: https://amp.theguardian.com/media/2013/apr/12/news-is-bad-rolf-dobelli)
뉴스로 먹고사는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우리 부모 세대까지만 해도 새벽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며 하루를 시작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뒤처지지 않고 남들이 하는 대화에도 자연스럽게 동참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첫 일과의 시작이었다. 통역대학원 준비하던 시절부터 시사 뉴스로 공부해왔던 지라, 나도 뉴스를 끼고 살았다. 그러다 위 가디언지의 기사를 읽고 관점이 달라졌다. 늘 뉴스를 확인하며 사는 생활에 이미 적잖은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가디언지에서 뉴스가 해롭다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뉴스는 사실을 호도할 수 있다.
-내 삶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
-(부정적인 뉴스에 노출되면) 몸에 해롭다.
-수동적으로 만든다.
-창의성을 저해한다.
뉴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팩트의 요약을 넘어 보다 입체적으로 뉴스를 다루는 심층적 보도 방식이 필요하다는 게 가디언지의 요점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 기사를 읽은 후부터 포털 등에 뜨는 단편적 뉴스를 보는 습관을 끊었다. (인터넷 시작 페이지에 뉴스가 뜨지 않게 했다.) 대신 나만의 양질의 채널을 구성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는 뉴스 소비도 각자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큐레이팅 할 수 있다. 매일 아침 영어 뉴스 채널로 그날의 주요 뉴스를 놓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로 국내 이슈를 점검한다. 글로벌 이슈를 파악하고 격이 높은 영어를 접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도 구독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매일 하루씩 심층적으로 이슈를 다루는 뉴욕타임스의 팟캐스트 'The Daily', BBC 뉴스, 알랑 드 보통의 위트가 넘치는 콘텐츠가 넘치는 The School of Life 등을 자주 청취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사용 패턴을 분석하고 뉴스 소비 방식을 점검한 것은 모두 ‘가지치기’ 활동이다. 가지치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내 삶에서 부차적인 것들은 차츰 덜어내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싶다. 에너지, 시간, 주의력을 쏟아야 마땅한 사람들과 일에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