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에 도착한 형님과 나는 단동으로 이동하기 위해 배를 타야 했다. 우리가 신의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저녁 무렵이어서 배가 끊긴 터라 하룻밤을 신의주에서 묵고 가야 했다. 되도록 비용을 아껴야 했던 우리는 역 근처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운영하는 달방을 하루 빌려야 했다. 충청도 예산이 고향이라는 집주인은 우리가 충청도 어느 곳에서 왔다고 말하니 동향 사람이라며 반가워했다. 주인장은 나라를 뺏긴 후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이들이 이곳을 거쳐가면서 많은 사연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적으나 마나 자신의 땅을 지어먹고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땅을 뺏기고 소작농이 된 이야기, 징병 간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빼앗긴 조국이 싫어서 떠난 온 이야기, 어린 딸을 방직공장에 억지로 취업시키라고 강요하는 면사무소 직원 등쌀에 야반도주한 이야기 등 모두가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의 승리 후 일본의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젊은 남자들은 씨가 말라가고 있는 간도 지역에서 이곳 신의주로 다시 흘러 들어온 이들의 이야기까지 비참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때문에 오히려 가난했지만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나의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호사를 누린 것 같아 미안함마저 느껴졌다.
밤이 깊어지자 자리에 누운 형님과 나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이내 잠이 들었다. 대화의 주된 내용은 형님이 맡은 군자금 전달책 일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고, 다시 조선에 들어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아침에 일찍 눈을 뜨신 형님은 간단한 요기를 위해 주변을 돌아보시고 오셨다. 역 근처라 일찍부터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아서 무얼 먹을까 걱정할 필요로 없었으나 돈을 아끼기 위해 국밥 한 그릇씩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침밥을 먹고 도착한 나루터에는 벌써부터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형님과 나는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배를 탈 수 있었는데, 막상 배를 타니 좀 겁이 났다. 압록강 푸른 물 위를 노 젓는 뱃사공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고 건너자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과 함께 생각보다 깊은 물길에 놀랐다. 강물의 푸른빛이 푸르다 못해 검은빛을 띠는 것은 그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기 때문일 거다. 이 강물을 건너면 조선 땅이 아닌 중국 땅이다. 난 형님처럼 일본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 말은 더더욱 모르니 말을 할 줄 알지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검문이 더 강화되어 내가 입을 열면 더 일이 복잡할 것이므로 형님은 내게 입단속을 시키셨다. 그래서 그런지 난 더 경직된 채로 형님 뒤만 묵묵히 따르며 생전 처음 보는 중국인들과 중국 땅을 그저 신기하게 두리번거렸다. 배에서 내리고 30여 분을 기다리니 형님과 만나기로 한 이가 우릴 알아보고 다가왔다.
"최 동지 오랜만이요. 그간 잘 지내셨지요?"
" 네, 임 선생님, 그간 무탈하셨지요?"
" 난 잘 지냈소. 다만 여기 사정이 좀 좋지 않으니, 할 일을 빨리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
"아, 그런가요? 자유시 참변 이후로 독립군들도 뿔뿔이 흩어졌다지요? 동지들 소식이 참 궁금합니다. "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보는 눈이 있으니 어서 이동합시다."
형님이 임 선생이라고 부르는 이와 우리는 그가 타고 온 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긴장이 풀리고 고단했던 탓인지 줄곧 잠을 잤다. 내가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땐, 차는 홍등이 여러 개 걸려 있고, 중국 여인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이 음식을 나르는 규모가 제법 큰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꽤나 비싸 보이는 청요리를 주문해 먹었다. 형님은 술도 한잔하셨는데 나에게도 한 잔 권하셔서 함께 마셨다. 술이라곤 아버지 기일에 제사상에 울리는 술을 받아먹은 것이 전부였는데 형님이 주신 술은 독해서 한두 잔을 마시고 나니 취기다 오르기 시작했다. 형님과 임 선생이라는 사람의 대화는 길어졌고, 난 그 두 분의 길어진 대화 속에서 맛난 청요리와 술을 실컷 먹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임 선생이라는 자를 따라 다꾸시를 타고 우리는 숙소로 이동했다. 그때부터 숙소에 들어가고 잠이 든 과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힘이 센 술 때문인지 임무를 무사히 마친 탓인지 큰 형님도 그날 아침엔 늦게까지 주무셨고, 우린 점심때가 다 될 무렵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의 맥고모자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간밤에 술에 취해 어디선가 잃어버린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형님께선 경성에 가서 다시 사주겠다 약속하시며 아쉬워하는 나를 위로해 주셨지만, 나는 큰 형님이 처음으로 사주신 선물을 술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후회를 했다.
조선에서 중국 땅을 밟는 것보다 그 반대로 조선으로 들어오는 것은 수월했다. 그건 아마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와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의 마음가짐이 달라서 일 거라 생각했다. 대련에서 단동으로 단동에서 신의주로 그리고 신의주에서 경성으로까지 돌아오는 길은 순탄했다. 형님은 경성에서 또다시 나에게 맥고모자를 사주셨고, 그런 큰 형님이 고맙기도 하고 형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형님과 나는 경성에 도착한 다음날에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돌아왔고,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님을 비롯해 큰형수, 누님까지 모두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셨다. 그간 맘고생이 얼마나 심하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이 집에 돌아오시자 이튿날부터 행랑채에 또 불이 꺼지지 않는다. 형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큰 형님을 찾는 손님이 매일매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큰 조카, 둘째 조카에 이어 큰형수가 셋째를 가지더니 눈에 보일 정도로 배가 불러 있었다. 큰 형님은 이 소식을 알고 계신 상태에서 대련을 다녀오신 것이었는지 나는 순간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내심 이번에도 사내 녀석이 태어나기를 바라고 계신 것 같으나 나는 딸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는 큰형수를 꼭 닮은 예쁜 질녀가 태어난다면 아장아장 걷기도 전에 업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고 1944년 새해가 되었다. 그 해 큰 조카는 어느덧 학교에 가게 되었다. 큰 형님은 큰 조카를 위해 책가방을 사 오셨는데 내가 봐도 탐나는 가죽 가방이었다. 욕심 많은 둘째 조카는 아직 학교를 갈 나이도 아닌데 자기도 같은 걸로 사달라고 떼를 썼고 큰 조카가 집에 오면 가방을 메고 다녔다. 나라는 아직 못 찾았고 막내 형님 소식은 아직 없었지만, 우리 집은 잠시나마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껴도 되나 싶을 정도였는데, 호사다마라 해야 할까? 큰 형님이 건강이 안 좋아지시더니 급기야 병석에 눕게 되었다. 늙은 의사 말로는 오랜 타지 생활로 영양이 안 좋은 상태에서 극도로 꼼꼼한 성격과 수면 부족으로 생긴 병이라고 했다. 병이 생긴 지 오래되었을 거라며, 큰 형님은 알고 있었을 거라고까지 했다. 그러면 언제부터였을까 수년 전 홀로 만주에 다녀오셨을 때일까? 아니면 막내 형님 소식 알아보신다고 목포에 가셨을 때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대련까지 다녀오셨을 때일까? 왜 나는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큰형수가 큰 형님 걱정으로 아기가 유산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얽힌 내 머릿속은 깜깜한 그믐날 밤 같았다.
그러기를 달포가 지난 후 큰 형님이 아침에 눈을 못 뜨신다는 소리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 달은 큰형수님의 산달이기도 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시고 삼 일 후 큰형수는 큰 형님을 닮은 딸을 낳았다. 그 아이는 유복자(遺腹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