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낙정리 전투에서 다리를 잃고 임시 수도 부산으로 와 두 번의 수술을 받는 동안 전쟁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나고 3개월 후,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파견되었고,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은 북진하여 11월에는 함흥 위쪽 지역과 신의주 일대까지 올라갔다. 다급해진 북은 1949년 이미 공산화가 된 중국에 중공군 투입을 요청했다. 이에 중국은 유엔군의 38도선 북상을 확인한 직후 몇 차례 소련 및 북한과 논의한 후 1950년 10월부터 중공군을 투입하여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하여 은밀히 밀려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중공군이 개입된 11월 이후부터 전쟁은 사실상 중공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한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제6사단 선두 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서부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유엔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듬해 1월 함흥 일대 이남으로 철수를 시작해 6월에는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 휴전이 논의되는 동안에도 국지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휴전 협상은 포로 문제 및 휴전선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계속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지루한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되었고, 6.25 전쟁은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 측의 미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때 한국 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
1952년. 전쟁 중에 이승만 정부는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수도 부산의 인심은 전쟁에 대한 책임과 여당에 대한 불신으로 새 대통령을 찾는 분위기였다. 이를 이미 알고 있는 이승만 정권은 일련의 정치 꼼수를 부렸고 국회의원을 강제로 연행하기까지 한 부산정치파동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정부가 어떠한 예고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탄 국회의원들을 연행을 한 사건의 시작이었다.
나는 두 번의 수술로 그때까지도 병원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고, 전쟁통이라 고향에 있는 가족과는 연락도 끊겨 아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행여 난리 통에 죽거나 다친 식솔들은 없는지 피난은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경무대 소속으로 전쟁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해 주는 윤가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윤 가는 대통령을 경호하는 직속 부대 소속이어서 누구보다 전쟁 소식에는 빨랐다. 그러기에 유엔군과 중공군의 전쟁 참여 같은 소식을 재빨리 듣게 된 것이다. 오늘도 윤가가 다녀갔다. 여소 야대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려는 이승만 정권이 야당 국회의원들을 버스에 태워 연행했다는 소식을 나에게 먼저 전해주고 갔다. 이로 인해 한동안 어수선한 부산은 누가 보아도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고, 내가 입원해 있는 국군병원에도 이 소식이 전해져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쟁 통에 일어난 일이라지만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라 여겨져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야당 의원 중에서는 의원내각제를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니 부산은 어찌 보면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리를 잃고 수술 후 생긴 상처도 아물어 커다란 흉터만 남기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쟁 중에 반공이라는 이념 논쟁을 내세워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을 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았던 유엔군과 중공군은 또다시 협상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산은 내 고향과는 달리 겨울이 따뜻했다. 내 고향에서는 겨울만 되면 꽁꽁 어는 강에서 썰매도 타고 얼음낚시도 했는데, 병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부산 시내 풍경은 나뭇가지의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가 없다면 겨울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가끔씩 전해주는 수간호사가 들려주는 바깥소식과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쬐며 먹는 간식거리는 병원 침상에서 누워 있지만, 마치 불란서 남부 휴양 도시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북유럽의 어느 나라 국민처럼 느끼게 했다.
수간호사는 전차를 탄 이야기와 부전 시장을 다녀온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퇴원해도 이곳 부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끝을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되었고 오늘은 전우들 중 일부가 퇴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 모를 퇴원 날을 기다리며 1952년 성탄절을 부산의 국군병원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