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

by 자강



지루한 전쟁은 끝날 줄 모르고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서울을 되찾고 북으로 계속 밀고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한참이 지났다.

전쟁의 양상이 그러한 사이 38선에서 한참 아래인 우리 동네에는 서울에서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평생 와보지도 않을 시골 오지에 온 그들은 옷차림을 봐선 도회지 사람으로 보였지만 힘든 피난길에 거지꼴로 마을에 온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씻지 못해서 그런지 몸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퀭한 눈에 움푹 팬 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살아있는 미라처럼 느껴졌다. 동생이 전쟁 전에 외삼촌에게 선물 받은 과학 책 속 사진의 미라가 꼭 그랬다. 게다가 전쟁 중에 받은 충격인지 어떤 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며 밤에도 동네를 배회하는 사람까지 있어 문단속을 잘해야 했다.

그러던 어는 날 우리 집에도 피난민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인민재판을 받은 충격으로 자리에 누우신지 오래되었고, 새엄마는 새 동생과 옥희, 성훈이 건사하는 데만 온통 신경을 쓰니 집안일은 내 몫이었던 즈음에 찾아온 서울 남자는 둘째 기창이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저 말씀 여쭙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

"아야, 누가 문 두드린다 나가봐라."

할머니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내게 말씀하셨다.

문틈 사이로 보인 사람은 젊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손을 놓칠세라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있었다. 새엄마 같았으면 문전 박대를 했겠지만 엄마 없는 나로선 엄마는 없고 아빠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손을 잡고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는 꼬마를 모른척할 수 없었다. 결국 가여운 맘에 나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저,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인데 처가가 있는 대구까지 가는 중에 잠시 머물다 갈 수 있을까요? 제 아내와 피난 중에 헤어졌는데 대구 처가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만날 수 있을 거고 아이 때문에 더는 못 갈 것 같아서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사정하는 남자의 말을 들으신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라는 암묵적 동의를 하셨다. 나는 대문에 걸쳐진 잠금쇠를 풀어 문을 열었다. 그들의 행색은 문틈 사이로 보았을 때보다 더 형편없었다. 여자아이의 헝크러진 머리는 엄마가 없다는 것이 느껴졌고 젊은 남자의 몸에는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그 둘을 집에 들이고 나중에 들은 얘기로 젊은 남자는 여자아이의 작은 아버지였고, 여자아이의 아버지와 엄마는 한강 다리를 차로 타고 이동하다 다리가 폭파되는 바람에 죽었다고 했다. 전쟁 중에 한강 다리를 차를 타고 이동한 사람이라면 나랏일을 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이거나 돈 많은 부잣집 사람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새엄마는 내심 그 아이를 집에서 잠시 쉬게 한 일을 잘했다며 칭찬을 했다. 난 도대체 뭘 잘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자아이가 눈칫밥은 안 먹겠다 싶어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전쟁 중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인심이 흉흉해지는데 피난민을 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새엄마의 처사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애처로운 어린아이를 잠시 들이는 일은 잘 한일이라 생각했다. 머물러봤자 이삼일이 될 것이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우리 집에서 꼭 이틀을 잔 서울 남자는 아이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돈과 귀중품을 모두 가지고 야반도주를 해 버린 거다.

"누나, 나와봐. 행랑채에 있던 피난 온 사람 도망갔어. 애만 놓고."

큰 동생 기만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침밥을 준비하던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급하게 마당으로 나왔다.

"애가 우는소리 들려서 방문을 열어 보니까 이 편지만 남겨놓고 가버렸구먼."

편지에는 대구까지 길이 험하니 부득이하게 아이를 맡겨 놓고 가게 되었다며 은혜는 꼭 사례하겠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가뜩이나 아버지가 마름 일을 놓으시고 전쟁통인데 입 하나 더 늘었다며 새엄마는 욕지거리를 했고 나는 또 하나의 어린 생명을 돌봐야 했다. 그러기를 세 달이 다 되도록 아이의 작은 아버지는 소식이 없었고 첫눈이 왔다. 추운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