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경(歸京)

by 자강




전차를 타고 윤가가 살고 있는 종각역까지 가는 내내 뿌연 밤안개 사이로 드러난 건물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해방 전 큰 형님과 함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경성을 방문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큰 형님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시고 무슨 말씀을 해주셨을지 짐작은 가지만, 실제 살아 계셔서 내 손을 잡고 보듬어 주신다면, 지금의 상처가 덜 아플 것 같아 아쉽고 서러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에서 뜨거운 땀이 흐른다. 전차 안은 늦은 밤이어서 몇 안 되는 승객이 타고 있지만, 행여나 이 뜨거운 땀이 흐르는 것을 들킬까 싶어 슬그머니 손등으로 닦았다. 이 전차가 아마도 막차일듯싶은데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타게 되어 다행이었다.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전차 문으로 뛰어가는데 목발을 한 난 뛸 수가 없어 속으로 참 답답했다. 게다가 낮에 비가 왔는지 땅은 쌀가루 반죽처럼 질척거려서 진흙에 박힌 목발을 빼내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런 내 모습을 용케도 본 기관사가 출발을 하지 않고 기다려 준 덕에 무사히 전차에 오를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전차에 오르자 전차는 출발을 했고, 천천히 움직이는 전차 안에서 빈자리를 찾아 앉기까지 나는 또 하나의 시험을 치렀다. 가랑이 사이로 펄럭이는 바지자락을 확인한 일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자리를 양보하기 싫어서인지 애써 외면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빈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전차가 곧게 뻗은 선로를 달릴 쯤에 다행히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고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내가 자리를 앉게 되니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통 내게 쏠려 있던 시선을 거두고, 모두 제각기 자기 일을 한다.

혹여 이 중에는 나를 가엾게 여겨 도움을 주려 한 이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을 하고 나 역시 내 할 일 한다. 하지만 전차 안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딱히 없다. 내가 내려야 할 종각역을 지나치지 않고 잘 내리는 것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흐르고 다음 역이 종각역이다. 벌써부터 긴장감이 감돈다. 머릿속으로 전차에서 안전하고 빠르게 내릴 방법을 백 번을 더 생각했다. 계단은 오르는 일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 이것은 마치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움직이는 전차에서 한쪽 다리만 있는 나로선 미리 일어서는 건 큰 모험이다. 그렇다고 입구까지 재빨리 걸어 나가기는 더 어려운 일이므로 난 기관사에게 양해를 구하는 쪽으로 방법을 정했다.

" 저 기관사님, 제가 다음 종각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몸이 불편해서 좀 천천히 내려도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애구, 젊은 양반 당연히 그리해 드려야지요. 어쩌다 그리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전쟁통에 몸이고 정신이고 어디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막차라 타는 이들도 없으니 염려는 붙들어 매고 조심히 천천히 내리셔요."

기관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설움이 가라앉는다. 그렇게 기관사의 큰 배려 덕에 전차에서 잘 내린 나는 윤가가 보내 준 주소 지번을 확인 후 천천히 윤가 집을 찾아 나섰다. 집이 종로경찰서 부근 어디라 했는데 거리는 어둑어둑해지고 안개까지 끼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어이, 최상사."

순간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봤고, 그곳에 검은 양복을 입은 윤가가 보였다.

윤 가는 잘린 내 왼쪽 다리의 바짓가랑이를 한 번 쓱 보곤 이내 시선을 내 얼굴로 옮기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곤 한참을 흘쩍인다.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나 역시 암말 없이 목말을 짚고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한참을 그리 서있다가 인기척이 들려 자리를 옮겼다.

"그려, 병원 생활은 괜찮았던 겨?"

"병원이 뭐 좋다고 괜찮고 말고 가 있겄냐. 그저 몸이 이리되고 보니 생각이 많아졌지."

"하, 전쟁통에 너같이 상이군경이 된 이들이 수없이 많다. 정부에서도 그 보상책으로 이리저리 생각은 한다마는 워디 그게 한두 푼으로 될 일이 겄냐. 미국 원조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인디 인심도 안 좋고 우리 이대통령이 밤잠을 못 자는 이유가 참 많다."

"그려, 경무대 근무는 할 만한 감?"

" 나랏일이 쉬운 게 어딨겄냐. 나야 시키는 대로 하면 그뿐이지만 휴전을 반대했던 남한을 미국이 곱게 볼 일도 없고, 정치적 계산만 남았지. 근데 저녁도 못 먹을 것인디 밥이랑 같이 반주나 한잔하고 가자."

윤가가 앞서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종로 골목길 어느 가게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늦은 밥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은 뒤 윤가 집으로 향했다.

너무 고단한 하루였던 탓에 윤가 집에 도착해선 어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리고 햇빛이 따갑게 창가로 들이치는 아침에 벽에 걸린 괘종시계 종소리에 눈을 떴다. 시간은 9시. 윤 가는 출근을 했고, 만날 시각과 장소를 적어 놓은 메모지와 자리끼가 나 홀로 남은 방에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에 벌컥벌컥 마셨던 막걸리 때문에 조갈이 난다. 윤가가 준비해 놓고 간 자리끼의 물을 단숨에 다 마셨다. 약속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무얼 할까 고민을 해봐도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윤가 집에서 경무대까지 전차로 몇 정거장이 안 되니 준비하고 전차를 타고 가는 시간까지 계산해 봐도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두 시간을 무얼 할까 고민하다. 우선 씻고 나가보기로 한다. 윤가가 새 셔츠와 바지, 양말을 챙겨놓고 갔다. 한 켤레의 양말을 보고 더 이상 필요 없는 양말 한 짝이 가여워져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켤레의 양말을 한 번에 모두 신을 수 없다면 각각의 양말을 두 번에 나누어 신으면 된다. 만일 내가 그 전투에서 이미 죽었다면 저 한 짝의 양말도 영원히 신을 수 없었을 테니까. 윤가의 집에서 불현듯 살아야 할 이유를 드디어 하나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