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 노가다
바쁘고 바쁘던, 사업지원팀에서 가장 야근 빈도가 잦은 T 과장. 어느 날, T 과장이 그를 부른다. 업무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한다. 애초에 그를 뽑은 이유가, T 과장의 업무를 덜어주기 위함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어온 터다. 드디어 그에게도 제대로 된 업무가 할당되는 것인가.
T 과장 : 얼굴아, 바쁘니?
그 : 아닙니다!
T 과장 : 그래? 이따 점심 먹고, 내 자리로 와. 외화 업무 인수인계해주려 그래.
그 : 알겠습니다!
외화 업무라. 그는 이 회사의 IT 사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외화 업무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없다.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배우면 되겠지. 점심 먹고, 그는 T 과장의 자리로 간다.
그 : 과장님, 저 왔습니다.
T 과장 : 어 그래, 여기 옆에 앉아.
그 : 네!
T 과장 : 우리 IT 사업부는, Cloud로 사업을 하고 있잖아. 매달 고객사들이 사용한 Cloud 사용료를, 외국 업체에 지불해야 해. 우리한테는 원가지. 이렇게 업체에서 인보이스가 날아와.
그 : (인보이스?)
T 과장 : 이 인보이스는 외국 업체가 준 거라, 달러로 금액이 표시되어 있어. 위층 재무팀에서 돈을 내보낼 때는 원화로 내보낸단 말이야. 그래서 인보이스를 수령할 때의 환율이랑, 재무팀에서 돈을 내보낼 때의 환율을 비교해야 해. 기표할 때는 해당 환차손을... ...
그 : (무슨 말인지 점점 못 알아듣기 시작한다)
그는 경영학도이긴 하나, 회계 쪽 지식이 아주 미미하다. 환차손, 환차익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시점부터 그의 이해가 0에 수렴하기 시작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경제 수업에서도, 환율이 오르고 내림에 따라 수출이 잘되고 수입은 불리하다느니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기껏 고심하여 결론을 내리면, 신기하게도 정답은 항상 그 반대였다.
T 과장 : 얘기를 많이 해줬는데. 어쨌든 실제로 해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을 거야. 여기 인보이스들의 달러 금액을 전부 엑셀 파일로 옮긴 다음에, 매매기준율 환율로 곱하면 원화 금액이 나와. 이 금액이, 절대로 틀려선 안돼. 그러면 업체에 돈이 잘못 나가는 거니까.
그 : (?) 아...
T 과장 : 이렇게 이 엑셀 파일을 만들고 나면, 이걸 기반으로 해서 이제 전표를 쳐. 매월 중순쯤 되면 내가 이 전표를 치기 시작하거든. 전표 수만 200개 정도 돼. (옆의 프린터를 가리키며)
그 : (??) 그러니까, 이 인보이스 파일들을 열어서 달러 금액을 적고, 환율을 곱해서 원화를 계산한 다음, 그 원화로 전표를 친다는 말씀이신가요?
T 과장 : 그렇지.
그 : 전표가 200개라 하심은, PDF가 200개인가요?
T 과장 : 대부분은 그런데, 꼭 맞지는 않아. 가끔 인보이스 하나에 전표 여럿이 될 수도 있거든. 그런 거는 이제 기술팀한테 문의해 본 다음에 처리해야지. 그래서 이 업무가 중요해. 숫자도 틀리면 안되고.
그 : PDF 달러 금액이랑, 원화로 계산해낸 값을 검증할 수 있나요? 전체 달러 금액이랑 원화 금액이 얼마인지 나와있는 페이지 같은 게 있나요?
T 과장 : 아니, 그건 없어. 손으로 계산해야 해.
그 : (??) 그러면 혹시라도 계산하다 틀리면...
T 과장 : 틀리지 않게 해야지. 계속해서 하다보면 숙달이 돼.
그 : (??) 이 달러 금액들은, PDF를 전부 열어봐야 하나요?
T 과장 : 그렇지.
그 : (200개를?) 인보이스랑 달러 금액을 쫘악 정리해놓은 걸로는 뽑을 수 없나요?
T 과장 : 그게 안된다고 하더라고. 계속 문의를 해봤는데, 없어.
그 : (??)...
T 과장 : 처음에는 나도 하고 얼굴이 너도 하면서, 서로 틀린 게 있는지 맞춰볼 거야. 그러다가 익숙해지면 이제 너한테 이 업무를 줄 거야. 이게 꽤 오래 걸려.
그 : 과장님 하시는데 얼마나 걸리나요?
T 과장 : 각 잡고 하면 이틀.
그 : ...
T 과장 : 자, 파일 지금 보내줬으니까. 이걸로 작업 시작해 봐. 끝나면 얘기하고. 나랑 맞춰보게.
그 : (...) 알겠습니다!
그가 T 과장 앞에서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었는지는 미지수다. 다만, 그는 T 과장의 업무 설명을 들으며 무언가가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PDF 파일을 일일이 열어서, 거기서 달러 금액을 보고 엑셀 파일에 손으로 옮겨 적는다. PDF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개, 많을 때는 200개가 넘는 것으로 보인다.
PDF 파일 더블클릭
-> 파일 열리면 달러 금액 눈으로 확인
-> 엑셀 파일에 해당 금액 수기 입력
PDF 편집기 기능이 없어서인지, 어떤 파일은 금액이 마우스로 드래그가 가능하나 어떤 파일은 불가하다. 결국 그는 하나하나 다 손으로 타이핑해서 넣는 방법을 택한다.
인보이스는 여기저기에 무슨무슨 영어와 숫자들이 산재해 있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되지만, 영어는 대부분 '계정명'이었고, 숫자는 '공급가', 'VAT', '할인액' 이었다) 그는 인보이스의 구성이나 용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T 과장이 보여줬던 것처럼, 가장 굵은 글씨의 달러 금액 숫자를 엑셀 파일로 옮긴다. 어떤 금액이 원가 금액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부분에서도 오류가 날 여지가 많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믿지 못했다. Human Error 라고 했던가. 아무리 단순 수작업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수십 수백 번 반복하다 보면 실수가 나오게 마련이다. 꼼꼼한 이들은 이 실수를 극한으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떤가. 물론 그도 실수를 줄이고자 노력하려 한다. 다만, 혹시라도 수작업이 틀릴 수 있으니 결과값을 검증할 수 있기를 바랬다. 실수해도, 검증해서 오류를 잡아내면 그만이지 않나. 문제는 T 과장의 말에 의하면 이 업무는 실수를 검증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업무 담당자인 T 과장과 그가 손으로 옮기고 계산해 낸 숫자만 존재할 뿐이었다.
PDF 200장을 어디서 출력해 왔길래. 이 200장을 다운받았다면 그 본래의 웹사이트에는, 분명 이 PDF들에 대한 정보들이 저장되어있지 않을까? T 과장은 계속 문의했으나 이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했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닫고, T 과장이 시킨 대로 일단 업무를 진행한다. 아직 신입사원인데. 입사한 지 고작 반년 조금 지난 그가 멋대로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 있겠지. 업무가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가 분명 있겠지.
처음이어서인지, 그는 PDF 200장을 클릭하고 열어 달러 금액을 베끼는 데에만 이틀이 걸렸다. 환율을 곱해 원화를 계산하고는, T 과장에게 다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당시 자신이 산출한 금액이 얼마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T 과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잠시 보더니
T 과장 : 얼굴이가 작업한 금액이랑, 내 금액이 차이가 나네. 이유가 뭐지?
그 : 아, 차이가 나나요??
T 과장 : 어, 500만 원 정도 차이 나. (제대로 기억나진 않는다)
그 : ...
T 과장은 너무 바빴는지, 피드백을 중단하고는 일단 전표 처리 작업에 돌입한다. 남겨진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이후에도 T 과장은 그에게, 이미 작업이 끝난 몇달치 인보이스를 주며 엑셀 파일에 옮기고 숫자가 맞는지 확인하곤 했다. 계산해낸 값은 계속해서 틀려, 똑같은 월을 2번 시키기도 한다. 그도 자포자기하여, PDF 열고 달러 금액 쓰기를 그저 좀비처럼 반복한다.
훗날 그가 혼자서 다시 자신의 파일을 검증했을 때, 마침내 오류를 찾아낸다. 오류는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 1,258$ 를 1,255$ 로 기재
- 39,969$ 를 36,969$ 로 기재
키보드 자판 위치 상, 2-5-8과 3-6-9 가 같은 열에 속한다. 그의 손가락은 이를 헷갈려, 5와 8을 혼동하고 6과 9를 혼동하여 타이핑한 것이다. 혹은 손가락을 위로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눌렀다던지. 다른 이들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 꼼꼼한 성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 당시의 그는, 이런 식의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계산해낸 값이 계속 달라지고, T 과장이 산출한 금액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슬며시 의구심이 생겨난다. T 과장이 수기로 엑셀 파일에 옮겨 산출한 저 값이 반드시 정답이라는 보장은 또 어딨는가. 혹시, T 과장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약 1달 정도의 시도 끝에, 어느 순간부터 T 과장은 그에게 외화 업무 인수인계를 그만둔다. 그는 이때를 생각할 때마다 의문이 든다.
그가 더, 조금 더 열정적으로 달려들었어야 하는 것인가.
T 과장이 바빠 보여도 붙임성 있게 옆에 달라붙어, 업무를 알려달라고, 다시 해보겠다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끈덕지게 달라붙어야 했던 것일까.
자꾸만 실수를 하는 하얀 얼굴 사원의 덤벙거림과 무능함 때문에, 결국 T 과장의 업무를 덜어주지 못했던 것일까.
외화 업무 인수인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T 과장은 매달 200여 개의 PDF 파일을 일일이 열어 엑셀 파일로 만들고, 그 파일을 기반으로 200여 개의 전표를 치며 야근한다. 그는 창고에서 물품을 빼서 불출하고, 전염병 전표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