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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카르마2

82 - 윤리교육 대리 수강

by 하얀 얼굴 학생

회사 홈페이지에 공지가 올리온다.

인사팀 : 모든 임직원께서는 윤리교육을 수강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육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사번으로 회원가입 및 로그인한 뒤, ... ... 최소 2개 강좌는 끝까지 수강해주셔야 수료증이 발급됩니다. 기한은 ... ...


기억에서 잊혀질 즈음마다, 교육 공지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고개를 들이민다. 이름도 그때그때 다르다. 성희롱 예방교육, 무슨무슨 준법 교육, 무슨무슨 안전 교육, 계절마다 무슨 교육... 그는 이러한 교육들을, 실제로 제대로 듣는 직원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선 현업이 바쁘다. 사업지원팀에서 가장 덜 바쁘고, 열정과 패기로 무장한 신입사원인 그.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교육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전표 치기, 창고 물품 빼기, 각종 취합과 문의로 얼룩진 일상. 그런 와중에 언제까지 교육 수강하여 수료증을 제출하라느니, 서명을 하라느니 등의 요구는 귀찮기 그지없다.


결국 영상만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한 번씩 들여다보며 '다음' 버튼만 클릭하며 겉핥기로 수강하기 일쑤다. 이러한 세태를 알아차렸는지, 교육 영상들에서는 각 챕터마다 '퀴즈'를 실시하여, 퀴즈를 틀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게끔 해놓았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추가적인 꼼수를 창출할 뿐이다.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교육 이름만 기입해도, 'OO 교육 퀴즈 답', 'XX 교육 퀴즈 답안' 같은 것들이 자동으로 연관 검색어에 떴다. 이런 검색어를 볼 때마다, 그는 교육을 대충 듣는 것이 자신만이 아님을 깨닫고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이전까지의 교육들은, 공지에 기한이 적혀있긴 했으나 인사팀에서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의 '윤리교육'은 무언가 다른가보다.


삘릴릴릴릴릴리

그 : 전화받았습니다

인사팀 직원 : 안녕하세요, 인사팀 직원입니다.

그 : 아 과장님 안녕하세요.

인사팀 직원 : 아 네, 혹시 누구신가요?

그 : 하얀 얼굴 사원입니다!

인사팀 직원 : 아 얼굴이구나. 왜 전화받을 때 전화받았습니다 라고 해?

그 : 네?

인사팀 직원 : 다른 직원들은 주로 누구누구입니다 라고 하면서 받아서 말야. 누군지 모르니까 다시 물어봐야하잖아.

그 : (...?) 아, 알겠습니다.

인사팀 직원 : 어 아무튼. 우리 회사 홈페이지에 교육 공지한 거 봤지? 그거 잘 챙겨줘야 해. 모든 임직원분들 다 교육 받게끔.

그 : 네 알겠습니다!

인사팀 직원 : 특히 임원분들 너가 잘 챙겨드려야 한다.

그 :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끝나고, 그는 IT 전체방에 다시 공지한다. 인사팀에서 공지한 윤리 교육을, 기한 내에 꼭 이수해 달라는 내용이다. '현업에 바쁘시겠지만' 이라는 문구도 덧붙이며 최선을 다하는 그다. 임원들에게는 개별 메신저로 한번 더 안내한다.

하지만 임원들은 항상 바빴고, 교육의 중요성은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인사팀의 공지를 전달하는 그조차도, 이러한 형식적인 교육들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사팀에서는, 예전과는 달리 이번 교육이 아주 중요한 교육인 것처럼 행동했다.




인사팀에 공지한, 교육을 수강해야하는 기한의 마지막 일 (저녁 6시 30분)

삘릴릴릴릴릴리

그 : 하얀 얼굴 사원입니다.

인사팀 직원 : 어 얼굴아. 교육 수강 현황 보고 있는데. IT 임원 한 분이 아직 교육을 안 들으셨는데?

그 : 아 네. 계속 연락드리고 있는데, 지금 외부 일정 중이십니다.

인사팀 직원 : 빨리 연락해서, 모바일로 수강하시라고 해봐.

그 : 알겠습니다.


임원 : 네, 전화받았습니다.

그 : 안녕하십니까! 하얀 얼굴 사원입니다!

임원 : 어 그래 얼굴아. 뭐 때문에 그러나?

그 : 인사팀에서 오늘까지 윤리교육을 수강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교육 수강 가능하십니까?

임원 : 아 맞네. 내가 계속 들으려고 하긴 했는데, 지금 외부 일정이라 밖이거든. 내가 핸드폰으로 한번 해볼 테니까. 얼굴이 너도 사무실에서 한번 해줘볼래?

그 : 알겠습니다!


그가 임원의 아이디로 접속해서 들어가니, 수강해야되는 교육 영상들이 절반 넘게 남아있다. 이 교육은 영상 자체가 길지는 않았으나, 중간중간 계속해서 클릭을 해줘야 하고 퀴즈까지 풀어야 하기 때문에 약 7시간이 소요된다. 이 시점의 시각이 저녁 6시 30분이었으니, 절반 남은 교육을 전부 수강할 경우 예상 종료 시각은 저녁 10시다.



인사팀에서 다시 전화가 온다.

삘릴릴릴릴릴리

그 : 네 과장님

인사팀 직원 : 어 얼굴아. 이거 윤리교육 홈페이지가, 오늘 저녁 9시에 닫히거든. 그때 이후로는 교육 기간이 끝나버려서, 해당 교육 접속이 안돼.

그 : (그때까지는 못 끝낸다) 아 9시 말씀이십니까. 우선 임원분께 연락드리고, 2개로 동시에 교육 진행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인사팀 직원 : 그건 중복 로그인이라서 안될 거야. 외부 일정 중이셔서 교육 수강 힘들 수도 있는데, 일단 얼굴이 너가 대신해서라도 교육 수강 진행해 줘.

그 : 알겠습니다.

인사팀 직원 : 혹시라도 수강 못하더라도, 최대한 수강률 많이 올라갈 수 있게끔. 알았지?

그 : 알겠습니다


임원에게서도 다시 전화가 온다

그 : 네!

임원 : 어 얼굴아, 지금 핸드폰 빠떼리가 다되서, 내가 교육을 듣기가 좀 힘들 거 같네

그 : 아, 제가 우선 대신 로그인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임원 : 어 그래. 수고 좀 해줘~

그 : 네!



이리저리 전화받고 말을 전달하는 동안 어느새 저녁 8시가 넘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임원의 아이디로 대신 로그인하여, 계속해서 윤리교육을 수강하고 있었다. 수강률은 이제 막 60%를 넘겼다. 7시간 소요되는 교육의 40%이니, 교육은 아직도 2.8시간 남았다. 교육 수강까지는 2.8시간이 남았는데, 홈페이지의 해당 교육 과정은 1시간 뒤 닫혀버린다. 결국, 교육을 100% 수강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남아서, 교육 영상을 틀어놓고 딸깍딸깍 클릭하고 있는 이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날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인사팀이 공지했던 기한의 마지막 날. 이 날은 금요일이었다. 저녁 9시가 다 된 시각,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 혼자 뿐이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들 '불타는 금요일'을 즐기고 있겠지. 임원이 참석하고 있다는 '외부 일정'도 아마 그런 것이지 않을까. 그렇게 울려대던 전화기도 조용한 것을 보니, 인사팀도 모두 퇴근하지 않았을까.


고요한 사무실 속, 그는 홀로 저녁 9시를 맞이한다. 홈페이지의 윤리교육 강좌는, 9시가 넘고도 약 10여분 더 열려있다가 마감된다. 수강률 76%에서 갑자기 모든 교육 화면이 꺼진다. 이후에는 다시 로그인을 해서 들어가도, 해당 교육명조차 조회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본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교육을 대리로 수강하던 그의 모니터만 덩그러니 켜져 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다가,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는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발로 차버린다. 의자에 부딪힌 책상이 몇 차례 일렁거린다.


그토록 매달렸던 중요한 윤리교육. 그는 임원이 이 중요한 윤리교육을 수강하지 못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것은 없었다. 임원도, 인사팀도, 이날의 윤리교육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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