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 회사에 들어올 때부터 은근히 들어온 괴담이 있다. 바로 '주말 등산' 이다. 이 회사는 공식적인 회사 일정으로, 1년에 몇 차례 다같이 등산을 가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했다. 전염병으로 인해 위층 관리팀 소수 정예로만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던 것을, 전염병도 잠잠해졌으니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애써 못 들은 척 했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갑갑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고참급 직원들은, '주말에 약간 고생해도 그때가 좋았더랬지' 라는 식의 이상한 향수 같은 것을 가졌다는 인상을 그는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우려하던 괴담이 현실이 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등산 문화의 부활을 알리는 부서는 다름 아닌 사업지원팀이다. V 차장이 IT 단체방에 공지를 올린다.
V 차장 : 내년도 시산제를 진행할 것이라고 인사팀에서 전달이 왔습니다. 관련해서 참석 여부 기입 요청드립니다. 불참하시는 분들은 별도 사유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일자 : XX년 01월 XX일 (토) XX시
장소 : XX산
S 팀장 : 조속히 업데이트 바랍니다! 다른 사업부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이니 참석 바랍니다.
V 차장이 공유한 시트 주소로 들어가니, IT사업부 인원 명단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이름 옆에는 참석 여부, 불참 여부, 불참 사유를 적도록 되어 있다. 벌써 몇몇 고참급 직원들은 참석으로 기입해놓았다. 젊은 직원들의 답변률은 비교적 저조하다. 눈치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사팀은, 유구한 전통인 '등산' 인원 취합 기간을 짧게 준 것 같다. 인사팀에서 등산 인원 취합 메일이 날아든 뒤부터, 해당 업무가 사업지원팀의 1순위 업무가 되어버린다.
S 팀장 : 차장님, 인사팀에서 등산 인원 언제까지 달라고 했죠?
V 차장 : 인사팀에서는 내일 오후까지 달라고 해서, 공지는 내일 오전까지 답변해달라고 했어요.
S 팀장 : 음, 지금 얼마나 답변했죠?
V 차장 : 시트 보면, 아직 절반이 안되네요.
S 팀장 : 아까 오전에 공지하신 거죠?
V 차장 : 네
오후, IT 단체방
S 팀장 : 산행 관련해서 참석 여부 안 올리신 분들 다 올려주세요
V 차장 : 구내전화번호 갱신 안내드립니다. 구내전화가 필요하신 직원분께서는...
S 팀장 : 이번 산행은 높으신 분께서도 IT와 함께하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IT 신규 입사한 젊은 사람들과 교류하실 예정이라고 하니 경조사 등 다양한 사정이 있겠으나 가능하신 분들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타팀과도 친목 도모할 수 있는 기회이니 참석 부탁드립니다~
S 팀장 : 특히 기술팀의 경우 고참급들 외에 거의 불참으로 보이는데 기술팀분들의 참석 부탁드립니다
등산 인원 취합 공지 직후부터, 단체방에서는 사업지원팀의 공지만 거듭 계속된다. 그가 인원 조사 시트를 다시 들어가니, 기술팀의 신규 입사자를 비롯하여 사원/대리급의 대부분이 '불참'으로 답변했다. 역시, 인원도 많고 하니 저렇게 다같이 힘을 합쳐 불참이라는 답변을 할 수 있는 것이구나.
나중에 알고보니, 기술팀 직원 중 한 명의 결혼식 날짜가 등산일과 겹쳤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해당 직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등산에 불참하겠다고 답변한 것이다. 물론 등산에 불참하는 기술팀 인원들이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동료 직원의 결혼식'은 가기 싫은 등산 권유를 방어할 최고의 명분이라고 생각한다.
등산 인원 취합이 한창인 와중에도, 그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사업지원팀원들은 말 안해도 주말 등산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암묵적 분위기다. 등산 인원 취합이라는 업무를 도맡아서 진행하는 부서이기 때문인가? 속마음은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사업지원팀의 장인 S 팀장이 가장 열성적으로 등산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으며, 팀원들도 별다른 말이 없다. V 차장은 애초에 참석으로 기입을 했고, T/U 과장은 참석 여부 기입도, 등산에 관한 말도 없다.
그도 이때까지, 등산 인원 시트에 참석 여부를 아직 기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게 대놓고 빨리 기입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단체방에는 등산 참석 여부를 기입하라는 안내가 계속되는 상황이다. 그는 아직은 열정이 넘치고, 눈치가 없는 신입사원이다. 왠지 가기 싫은데. 아니, 이것도 경험인가? 그는 운동을 좋아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성향의 그는, 이 회사의 등산이 오히려 재밌고 잘 맞을 수도 있을까? 그런데 또 하필 주말 토요일이라는 점은 꺼림칙하긴 한데.
보다 못한 것인지, V 차장이 입을 연다.
V 차장 : 얼굴이도 아직 기입 안 했네. 갈 거지?
그 : 아 차장님. 안 가면 어떻게 되나요?
V 차장 : 막내가 빠지면 그렇지. 너 없으면 누가 짐 나르고 그래.
그 : (나를 필요로 한다?) 아...
V 차장 : 갈 거지?
그 : (한 번만 가볼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