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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Feb 12. 2022

1번째 기업

1 - 서류 합격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업계를 가리지 않고 사기업 해외영업과 경영기획 직무 공고에 이력서를 집어넣던 그에게 서류 합격 메일이 도착했다. 그는 어느 책에 나 '초심자의 행운'이 다가온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70여 차례의 서류 탈락을 경험하며, 그는 나름대로 판단이 서기 시작한다. 그는, 매출액이 최소 1000억 이상은 되는 기업을 첫 직장으로 삼고 싶다. 기업은 크게 대 / 중견 / 중소기업으로 나뉜다. 직원수, 매출 등의 기준으로 분류하긴 하지만, 분류가 명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그래서 그는 자의적으로 매출과 인지도로 기업을 분류했으며, 이러한 분류는 오차가 있긴 하나 대략적으로 맞다. 그의 분류는

 대기업 -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알고, 매출액이 1조에 가깝거나 이상인 기업

 중견기업 -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고, 매출액이 수천억 대인 기업

 중소기업 -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고, 매출액이 1000억 아래인 기업

 

 그는 자신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에 접었다. 혹시라도 운이 좋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학점도 낮고 스펙도 전무한 그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번쩍번쩍한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리라는 기대는 아예 접는다.

 대기업 신입사원을 배제하고, 그는 중소기업 신입사원도 배제한다. 그는 자신이 대기업은 못 가더라도, 중소기업보다는 나은 곳을 갈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못해도 중소기업 중에 알짜배기 강소 기업은 갈 수 있겠지, 아니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 중견 기업은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서류 합격한 1번째 기업은, 매출액 5000억이 넘는 중견 제조업체다.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업으로, 중견기업이지만 인지도만큼은 대기업에 버금간다. 1000억 이상 기업을 목표로 삼은 그의 기준에 적합하다 못해 감사하기까지 한 기업이다.


 그는 수많은 기업에 지원하기 때문에, 제출한 자기소개서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회사의 어느 직무에 지원했는지마저 헷갈린다. 서류 합격 메일을 받고 난 이후, 그는 1번째 기업의 채용 홈페이지를 다시 찾아 자신이 제출한 이력서를 열람한다. 1번째 기업의 경우, 지원 직무를 2지망까지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1지망과 2지망을 똑같은 직무로 중복 선택하지 못하도록 설정해 놓았다. 당연히 그의 1지망은 해외영업이다. 2지망을 무엇을 넣을까 고민하던 그는, 영업기획 직무를 고른다. 국내영업보다는, 영업기획이 왠지 고급스럽고 덜 고생스러운 느낌이 들어서다. 그가 채용 홈페이지에서 작성한 이력서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1번째 기업

    1지망 - 해외영업 / 2지망 - 영업 기획

    이름, 나이, 국적, 생년월일, 핸드폰 번호, 영문 이름, 한문 이름, 주소

    병역사항,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경력

    공인외국어시험, 해외경험, 자격증, 컴퓨터활용능력, 수상경력, 학내외 활동

    자기소개서

        1) 직무 관련 차별화된 강점, 강점을 통한 기여 방안 500자

        2) 열정, 도전 경험 500자

        3) 당사 인재상 중 택 1, 관련 경험 1000자



 인적 사항과 학력 사항은 기재하고 나면 빼곡히 들어찬다. 하지만 자격증, 직장 경력 등 이력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빈칸이 많아 허전하다. 허전하다 못해 휑해서, 그는 억지로라도 빈칸을 채우려 애쓴다. 컴퓨터활용능력에 각종 프로그램들의 활용도를 모두 '하'로 적어 넣고, 자격증에는 운전면허라도 써넣고, 직장 경력에는 아르바이트 경력을 써넣는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빈칸 투성이 이력서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1번째 기업의 자기소개서는, 다른 기업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난한 문항들이다. 그는 70여 차례 이력서를 쓰고 떨어지며 깨달은 바가 있다. 기업들은 하나같이 도전 / 열정 / 소통 / 직무 경험에 대한 자기소개서를 원한다는 점이다. 끊임없는 탈락과 지원의 고리에서, 그의 자기소개서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다듬어져 왔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경우 복사-붙여넣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가끔 하나씩 색다른 질문이 섞인 기업들이 있었고, 똑같은 주제라 하더라도 글자 수가 다르면 줄이거나 늘려야 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서 겪다 보니, 막학기 이전에 이미 대표적 질문들에 대한 자기소개서가 있었다(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지, 문항의 의도를 분석해서 치밀하게 잘 작성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세밀하게 조사하고 치밀하게 작성하던, 설렁설렁 복사-붙여넣기를 하던 어쨌든 이력서를 작성해서 최종 지원하기까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된다. 적어야 할 것, 필수로 채워 넣어야 할 것, 개인정보 동의 체크 등 절차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기업들에 '미친 듯이' 이력서를 제출하고 있다. 이력서 하나하나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은 그의 전략이 아니다. 하나의 이력서에는 최소한의 에너지 투자하고, 그의 체력이 버텨주는 범위 내에서 이력서를 최대한 많이 뿌리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1번째 기업에 제출한 이력서는, 이런 식으로 그가 에너지 투자를 최소화한 이력서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그는 서류 합격 메일을 받았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의 성과를 얻었다는 생각에, 그는 왠지 남들보다 이득을 봤다는 기분이다. 매출 5000억에 인지도도 높겠다,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업이다. 그는 면접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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