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를 통과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불리함을 인식하고 있다. 서류를 통과했더라도, 앞으로의 전형에 서류가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면접을 본 인원들 중, 면접에서의 평가가 비슷하다면 스펙이 좋거나 자격증이 많은 지원자가 더 우위에 설 것이다. 서류 전형이 끝나긴 했지만, 서류는 꼬리표처럼 붙어서 지원자의 평가에 따라다닌다. 학점도 낮고 스펙도 전무하다시피 한 그는, 턱걸이로 간신히 서류 합격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턱걸이로 간신히 통과한 그의 서류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불리한 꼬리표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면접에서 뒤집고자 한다. 면접관이 서류만 놓고 그를 보았을 때는 '학점도 스펙도 좋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지원자' 였지만, 면접이 끝난 이후에는 '학점과 스펙은 별로지만 열정 있고 잠재력이 있는 지원자' 라는 이미지로 바꾸려는 생각이다.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는 열정과 자신감이 넘친다. 다른 사람들은 힘들다 하더라도 왠지 자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런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즉 면접에서 점수를 확실히 따기 위해서는, 면접 준비를 빡세게 해야 한다.
그는 면접 준비를 함에 있어, 이전에 만났던 졸업 선배의 조언을 철저히 따르기 시작한다. 선배에게서 받은 면접 준비자료들을 세세히 읽는다. 선배의 면접 자료는 크게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회사 분석 / 직무 분석 / 면접 질문 대비다. 그는 선배의 자료를 참고하여, 자신의 버전으로 개조해서 다시 만든다.
1. 회사 분석 자료 (출처 : 회사 홈페이지, 재무제표, 뉴스)
1) 인재상
2) 경영목표
비전, 이념
3) 회사 소개
회사 연혁, 본사와 대리점 현황, 사업영역
4) 재무 상태
자산, 자본, 부채, 각 계정과목들 금액 정리
5) 사업 현황
어느 사업에서 얼마나 매출이 나는지, 수출하고 있다면 나라별 매출 비율
6) 기업 홍보 활동
박람회 참가 뉴스, 봉사활동 뉴스 등
7) 그가 냈던 이력서
2. 직무 분석 자료 (출처 : 회사 홈페이지, 재무제표, 검색)
1) 해외영업, 영업기획 직무 내용
2) 채용 공고
3) 해당 직무 종사자 인터뷰
검색에 더해, 그는 대리점을 직접 찾아가 여러 가지를 묻는다.
4) 직무 관련 용어 (해외영업이니 수출입 위주)
3. 면접 질문 (출처 : 잡X래닛, 유튜브 면접왕 X형 / 인X담당자)
1) 기존 면접 후기들로부터 질문을 모조리 복사
2) 답변 Script 작성
제출한 자기소개서와 연동하여, 일관성 있는 답변을 제작
3) 영어 질문 대비
작성한 답변들을 영어로 변환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면접 준비를 하는 그로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회사 분석 자료, 직무 분석 자료, 면접 질문의 3가지 자료가 모두 완성되기까지는 일주일의 시간이 걸린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회사 분석 자료에서, 재무제표를 참고해 뽑아낸 회사 재무 상태와 사업 현황이다. 0번째 회사 면접에서 재무제표를 보지 않아 탈락했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재무제표에 집착과도 같은 강박을 지니게 만들었다.
그는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재무제표를 모조리 출력해서, 줄을 그어가며 계속해서 읽는다. 처음에는 도무지 들어오지 않던 내용들이, 두세 번 반복해서 읽기 시작하자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재무제표는 너무나도 방대하며, 정보도 과하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뽑아, 표를 다시 작성한다. 그는 자신이 보았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계정과목과 금액들만 뽑아서, 그만의 '간이 재무제표'를 만든다. 손익계산서도 간단하게 다시 정리한다. 그의 간이 재무제표는
재무상태표 (자산 = 부채 + 자본)
자산
유동자산
현금및현금성자산
매출채권
재고자산
비유동자산
유형자산
무형자산
부채
유동부채
매입채무
단기차입금
비유동부채
장기차입금
자본
자본금
이익잉여금
손익계산서 (그는 매출액, 영업이익, 당기순이익이 왠지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매출액
- 매출원가
= 매출총이익
- 판관비(판매비와 관리비)
= 영업이익
- 영업외수익,비용 (생략)
= 법인세비용차감전 순이익
- 법인세비용
= 당기순이익
이런 식으로 그는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를, 표를 만들어 간단하게 다시 작성해서 뽑는다. 그리고는 그 금액들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는 해당 계정과목들이나 금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재무제표를 보지 않아 탈락했던 경험으로 인해, 그냥 용어와 금액들을 외우기 시작한다. 외우다 보면 이해가 되겠지, 이렇게라도 알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다.
직무 분석 자료를 준비하며, 그리고 그가 유튜브를 통해 계속 들은 내용이 있다. '현직자를 반드시 만나서 인터뷰해보라'는 내용이다. 너무나도 어렵고 막연하다. 현직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이며 무엇을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그는 1번째 면접이므로 무식한 용기를 갖고 있다. 고민하던 그는, 네이버 지도에서 1번째 회사의 대리점을 검색한다.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정해서, 무작정 찾아간다.
1번째 회사는 본사와 대리점이 나누어져 있는데, 대리점 직원들은 판매와 설치만 담당할 뿐 본사 소속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쳐들어간다. 그의 집에서 가까운 대리점 총 3곳을 방문했는데, 두 곳은 직원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바빠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다. 마지막 한 곳을 가보니, 대리점 사장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있다. 그는 사장에게 다가가, 1번째 회사 면접 준비를 하는 취준생이며 몇 가지 여쭤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이름, 나이, 학교까지 모두 말한다. 아마 그는 꽤나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을 것이다.
사장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다. 딱 봐도 못 믿는 눈치, 그를 '도를 아십니까' 같은 이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더니, 들어오라고 한다. 그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대리점 안에는 사장을 제외하곤 사람이 아무도 없다. 원래는 제품을 설치하는 기사가 있는데, 설치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는 회사 홈페이지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제품들을, 드디어 실물로 접한다. TV 속 연예인을 실물로 본 것처럼 신기하다.
그는 대리점 사장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제품의 가격은 얼마인지, 어떤 제품이 가장 잘 나가는지, 경쟁사는 어디인지,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장단점은 무엇인지, 일하시면서 본사에 바라는 점은 있는지 등의 내용이다. 취업이 꽤나 절박한 데다, 기왕 찾아왔으니 염치 불고하고 모조리 물어보자는 생각에 그의 얼굴에 철판이 깔린다. 대리점 사장은 그의 질문에 맞춰 이것저것 말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질문 거리가 모두 떨어진다.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려 할 즈음, 대리점 사장이 말을 꺼낸다. 원래는 그를 대리점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어디 리서치 기관에서 나온 것이거나, 다른 경쟁사의 스파이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생각한 '도를 아십니까'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장의 눈빛은 의심의 눈초리가 맞았다.
대리점 사장은, 자신에게도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 한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아들뻘인 그의 나이를 듣고서는 속는 셈 치고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말한다. 그는 대리점 사장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자신은 리서치 기관에서 나왔거나 경쟁사의 스파이가 아니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대리점 사장도 경계심이 약간 풀렸는지, 대리점 한쪽에 있던 회사 제품 카탈로그를 가져다준다. 그는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며, 대리점 밖으로 나온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찾아보고 알아보는 자신, 그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대리점 사장, 왠지 느낌이 좋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리점을 방문해서 얻은 정보들 중 특별히 뛰어나거나 도움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움직여서 방문했고, 대리점 사장과 대화를 했다는 점, 제품들을 실물로 봤다는 그 경험 자체에 의미가 컸다. 그는 대리점 사장이 준 카탈로그를 교과서 삼아, 펜으로 온갖 필기를 하며 공부한다.
대리점 방문, 사장이 준 카탈로그, 재무제표를 보며 계속해서 정리를 해나간다. 방법도 잘 알지 못하고, 요령도 없는 무식한 정리의 반복이다. 하지만 이런 무식한 정리도 계속하다 보면 어떻게든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가 오른 경지는, 몇몇 숫자들을 암기하게 된 것이다.
한 번 암기가 되기 시작하자, 그는 더욱더 암기에 열을 올린다. 면접에 나가는 것인지, 숫자 암기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다. 그는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취업에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의 무식한 반복에 계속해서 윤활유를 제공한다. 면접 하루 전, 그가 암기에 성공한 숫자와 정보는 다음과 같다.
"19XX 설립, 19XX 유가증권시장 상장, 국내 X위 기업, XX년 연속 판매 1위, 대표 XXX, 임직원수 XXX명, 로고의 색깔과 의미, 회사 이름 의미, XXX년 첫 제품 제작, 연간 XXX대 생산, 공장 위치, 공장 총 생산능력 XXX억원, 생산 실적 XXX억원, 평균가동률 91%, 관계사들 이름, 해외 법인들 이름, 국내 XX개 대리점, 특화 대리점 XX개, 전년도 연결매출 XXXX억, 영업이익 XXX억, 영업이익률 XX%, 당기순이익 XXX억, 연구개발비 XXX억, 매출대비 연구개발비율 X%, 전년도 제품 가격 단순평균 XXXX원, 1번째 기업의 유명한 광고 사례"
그는 적혀 있는 순서 그대로 달달 외운다. 만일 회사에 대해 아는 것을 어필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 내용들을 달달 외워버리리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면접관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는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