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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Feb 19. 2022

1번째 기업, 1번째 면접

3 - 면접, 주재원 아들

 정장에 구두를 신고, 그는 아버지에게서 서류 가방을 빌린다. 검은 가죽 소재에 한쪽 어깨로 매는 크로스백으로, 오랜 세월이 묻어나긴 하지만 나름 고풍스럽고 회사원 느낌이 나는 가방이다. 가방 안의 빳빳한 비닐 파일에는, 그가 그토록 열심히 준비한 면접 자료들이 반듯하게 담겨 있다.


 면접 장소는 여의도다. 버스를 탔다가 괜히 차가 막혀 늦지는 않을까, 그는 도착 시간이 비교적 확실한 지하철을 이용한다. 여의도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넓은 광장과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그가 국회의사당을 실물로 본 것은 초등학교 시절 때가 마지막으로, 참으로 오랜만의 광경이다. 면접장으로 향하는 도중이어서인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고 설렌다. 넓은 광장, 국회의사당, 광장 여기저기 회사원으로 보이는 무리들 등 모든 요소가 그의 감각을 자극한다.



 1번째 기업 인사팀의 이메일에는, 오후 1시까지 도착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긴장한 탓인지 무엇 때문인지, 명시된 시간보다 1시간 먼저인 12시에 도착을 해버렸다. 대기실에 들어서고, 인사팀 직원이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한다. 인사팀 직원은 약간 당황한 눈치다. 점심은 먹었느냐며, 이제 직원들은 점심을 먹으러 가니 그에게도 점심을 먹고 오라고 말한다. 그는 알겠다고 말하지만, 점심을 먹을 생각이 없다. 그는 면접 전에 점심을 먹으면, 왠지 탈이 나거나 신경이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의 위장은 면접에 약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인사팀 직원은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그 혼자 대기실에 남아 있다. 그는 자료를 읽으며, 외워온 숫자를 계속해서 되새긴다. 아직도 45분이나 남았다. 다시 집중해서 자료를 보고 나니, 아직도 30분이 남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대기실을 한 번 돌아본다. 대기실 뒤쪽에, 1번째 회사의 제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가 다가가서 보니, 최근 1번째 회사가 새롭게 만든 신제품이다. 카탈로그와 뉴스 기사로 수없이 접했던 신제품이라, 그는 단박에 알아챈다. 혹시라도 어필할 수 있다면, 면접 대기실 구석에 있는 신제품을 봤다고 이야기하리라.


 인사팀 직원이 돌아오고 얼마 있지 않아 면접이 시작된다. 그가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암기를 반복하고 있는 사이, 같이 면접에 들어갈 다른 면접자들도 도착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료에 집착한다. 매출이 얼마인지, 영업이익이 얼마인지, 법인세가 얼마인지, 제품 이름이 무엇인지, 회사 인재상이 무엇이었는지 등 외운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하다.




1번째 회사, 해외영업부문

면접자 (총 4명): 그의 시점에서 왼쪽부터이며, 모두 남자다. 그는, 직무가 해외영업이라 남자를 선호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동글동글한 체격과 얼굴에 안경을 낀 면접자 1

    키가 크고 서구적으로 생긴 면접자 2

    피부가 하얗고, 키는 중간에 덩치가 있는 면접자 3

    그

면접관 (5명) : 그의 시점에서 왼쪽부터, 나이는 추정이며 모두 남자다.

    안경을 낀 30대 후반 정도의 면접관 1

    머리가 짧고 눈매가 날카로운 40대 면접관 2

    피부가 까맣고 안경을 낀, 50대 면접관 3

    상고머리에 희끗한 머리가 보이는 30대 후반 면접관 4

    특징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는 40대 면접관 5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면접자들 중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그는 공통질문을 받을 때는 가장 마지막에 답한다.


 면접관 : 자기소개해보세요.

 면접자 1 : 안녕하세요, OO살, 면접자 1입니다. 저는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서 외국에 다녀왔습니다. ...


 아버지가 주재원이라는 말에 그의 정신이 번쩍 뜨인다. 말로만 듣던, 주재원 아빠를 따라가 외국 생활을 오래 한 해외파다. 해외영업 지원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른 면접자들도 하나같이 아버지주재원이다.


 면접자 2: 주재원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 가서... 필리핀에서 농구 선수를 하고... 7년 정도 외국에 있었습니다.

 면접자 3 : 주재원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다가... 미국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를 전역하고... 철강 회사에서 인턴 했습니다.


 그를 제외한 모든 면접자들이 최소 5년씩은 해외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 속으로, 다들 영어를 잘하겠거니 생각한다. 그는 고작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1년이지만, 영어만큼은 꽤 한다고 자신한다. 또한 다른 면접자들을 보니, 해외파라 그런지 면접 답변이 중구난방이다.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답변이지만, 안 좋게 말하자면 생각하는 대로 나오는 답변이다. 그는 자신에게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감을 보이고자 한다.


 그 : 안녕하십니까, 1번째 회사 해외영업 업무에 지원한 '하얀 얼굴'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실행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3가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 생활인 공놀이를 통해 친화력을 길렀습니다. 공놀이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팀을 이루며 친화력을 길렀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상 두 가지 강점, 실행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1번째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 지원자 '하얀 얼굴'입니다.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이후, 5명의 면접관이 지원자들에게 차례로 개별 질문을 하는 식으로 면접이 이어진다.

 면접관 5 : 첫 자기소개 관련 질문, 해외 거주 경험에 대한 질문

 면접관 4 : 해외영업 직무에 지원한 이유

 면접관 3 : 가장 힘들었던 경험, 그 경험에서 배운 점

 면접관 2 : 약간 날카로운 질문. 취업 준비를 언제부터 했느냐. '하얀 얼굴' 씨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영어 실력이 미흡하지 않겠느냐

 면접관 1 : 이전 답변 중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점 설명 요구

 면접관 3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5명의 면접관이 4명의 지원자에게, 한 번에 한 명씩 질문을 한다. 마지막 말을 하기 전까지, 최소한으로 잡아도 20번 이상의 문답이 오간다. 면접 자리이고, 서로 말을 끊지 않고, 특히나 면접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을 어필하려 안간힘을 쓰기 때문에 발화 시간은 1분을 넘는 경우가 많다. 당초 메일에는 면접 시간이 30분으로 잡혀 있었으나, 실제 면접 시간은 40분을 넘긴다.


 그는 면접관들의 질문도 주의 깊게 듣고, 다른 면접자들의 답변도 주의 깊게 들었다. 면접관들은 군대 등 사적인 질문도 했다. 그는 집중하고 열심히 들었으므로, 면접이 진행될수록 다른 면접자들에 대한 정보가 쌓인다. 정보와 더불어, 다른 면접자들의 실수도 파악한다. 그가 파악한 정보와 의견은 다음과 같다

 면접자 1 : 해외 거주 5년, 자신감이 덜한 듯한 말투, 스펙은 알 수 없음. 해외대 졸업 후 세계 여행을 하다가 도중에 중단. 왜 그만두었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계획대로 잘 되지 않아 중단했습니다."라고 답변.


 면접자 2 : 해외 거주 7년, 필리핀에 있을 때 농구 선수, 농구 선수 생활로 인해 관절이 악화되어 공익, 해외대 졸업, 외무고시를 시도하다가 취업으로 전향. 외무고시 후 취업준비 상황에 대한 면접관의 질문에, "작년에는 대기업 위주로 넣었지만 떨어졌습니다. 올해는 취업 시장이 좋지 않아, 중견 기업을 넣었습니다."라고 답변.


 면접자 3 : 해외 거주 5년 이상, 해외대 졸업, 유학생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군대를 장교로 갔다고 함. 장교 전역 후 철강업계에서 인턴 경험.

 스펙, 말투, 준비해온 스토리가 꽤 그럴듯하다. 그는 면접자 3이 가장 이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때, 면접자 3도 실수를 한다.

 왜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면접자 3은 자신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떨어진 것 같다고 답한다. 다른 면접관이 끼어들어, 인턴 했던 회사가 어디냐고 묻는다. 면접자 3이 모 회사라고 답하자, 면접관은 "거기는 철강 아닌데?"라고 말한다. 면접자 3은 심히 당황해서, 자신은 철강으로 알았다며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못한다.



 그는 학점도 낮고, 스펙도 전무하며, 다른 지원자들처럼 해외 거주 경험이 길지도 않다. 다른 지원자들이 말주변이 없을 뿐, 실제 내공이나 역량은 상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른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볼 수 없다. 그는 단지 자신이 본, 다른 지원자들의 답변 내용과 말투 등으로 흐릿하게나마 평가할 뿐이다.


 그도 제대로 된 면접 경험은 거의 없다.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는 면접 관련 유튜브를 수 차례 보았다. 면접 유튜버들이 가장 강조한 점은, 굳이 꼬투리 잡힐 만한 내용은 아예 말하지 말는 점이다. 면접자들은 답변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약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인 대화 상황에서는 흔하고 평범하지만, 면접은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자진해서 면접관에게 약점을 자수할 필요는 없다. 굳이 약점을 묻는다면 이러이런 약점이 있었지만 이제는 극복했다는 식으로 말하라고 한다. 면접이라는 자리 자체가 그런 자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돋보여야 하는, 어떻게든 자신을 어필해서 팔아야 하는 자리다.


 그는 면접자 1,2가 자진해서 약점을 드러내버렸다고 생각한다. 솔직함을 전략으로 삼은 것일 수도, 아니면 별로 이 회사에 붙을 생각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면접자 3은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면접 답변이나 스펙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인턴했던 회사의 업계를 잘못 답변함으로써 이미지가 크게 깎였다.



 면접관들은 그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호주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1년 동안의 워킹 생활에서 무얼 배웠느냐, 아무리 호주를 다녀왔더라도 해외영업 직무를 수행하기에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 않겠냐는 질문이다.

 그는 설거지, 소고기 공장, 청소, 건설 현장, 웨이터 등 10가지 이상의 일을 했다고 답했다. 해외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배웠으며(이 답변에 면접관 3이 희미하게 웃는다), 영어는 지속적으로 주말에 스피킹 스터디를 하고 있으니 문제없다고 답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약간씩 아쉬움이 남는 답변들이다.


 모든 면접관이 질문을 마친다. 면접이 끝나가는 분위기다.

 면접관 3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면접자 1부터 하세요.


 면접자 1, 2, 3이 차례로 마지막 말을 한다. 불러주셔서 감사하다, 저는 이런 강점이 있다, 뽑아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는 다른 면접자들의 답변을 들으며, 승부수를 던질까 고민한다. 외운 것을 모조리 보여주겠다고 할까? 시간 없다고 중간에 끊어버리면 어쩌나. 괜히 외운다고 했다가 갑자기 입이 안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그의 차례가 된다. 그는 눈 딱 감고 말한다.


 그 : 다른 면접자들이 너무 쟁쟁해서 제가 조금 밀리는 것 같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준비하며 외웠던 내용을 이 자리에서 외워보겠습니다.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면접관들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잠시 뒤,

 면접관 1 : 네, 해보세요.


 그는 이때 아마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그는 얼굴의 열기를 느끼며 입을 연다.

 그 : 감사합니다. 1번째 회사 19XX 설립, 19XX 유가증권시장 상장, 국내 X위 기업, XX년 연속 판매 1위, 대표 XXX, 임직원수XXX명입니다. XXX년 첫 제품 제작, 연간 XXX대 생산, 공장 총 생산능력 XXX억원, 생산 실적 XXX억원, 평균가동률 91%, 국내 XX개 대리점, 특화 대리점 XX개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전년도 연결매출 XXXX억, 영업이익 XXX억, 영업이익률 XX%, 당기순이익 XXX억, 연구개발비 XXX억, 매출대비 연구개발비율 X%, 전년도 제품 가격 단순평균 XXXX원... 입니다.


 그는 자신이 외웠던 정보의 약 80%를 그대로 외워버린다. 기억나지 않는 나머지 20%를 기억해내려고 하다,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면접관들의 눈빛을 보곤 그만둔다.


 면접관 3 : 저도 못 외우는 걸 외웠네요. 수고했어요.


 면접이 끝났다. 그는 회사 이름 뜻, 유명한 광고 사례 등을 외운 정보에서 빼먹었다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이미 면접은 끝났으며, 돌이킬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면접을 잘 본 것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다만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자신은 약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며, 마지막에 서커스처럼 암기 쇼를 펼쳤다. 그의 암기 서커스가 긍정적이었을지 부정적이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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