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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Jun 18. 2021

배탈 난 돼지

조각글

그가 다니던 유치원은 요일마다 정해진 시간표가 있었다.  


 월요일에는 이걸 하고, 화요일에는 저걸 하고, 수요일에는 또 뭘 하는 식이다. 무슨 요일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은 유치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의 연극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동물 그림을 코팅해서 나무젓가락에 붙여 놓고, 그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로 연극을 했다. 작은 상자 같은 것을 무대로, 나무젓가락 인형을 잡고 손만 내밀어 흔들며 목소리를 흉내 내는 연극이었다. 햇볕이 따뜻하게 비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 아이들 모두가 무조건 한 번씩은 역할을 맡아 연극을 해야 했다. 유치원생을 위한 동물 이야기 5개 정도였고, 그는 무난한 이야기의 무난한 강아지 1 같은 역할을 맡아 끝냈다. 어차피 해야 했는데 먼저 끝내버리니 속이 후련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다른 친구들이 연극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며 시간만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일이 터졌다. 문제가 된 연극의 이야기는 '배탈 난 돼지' 였다.

 동물 친구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돼지는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던 나머지 계속해서 먹다가 배탈이 나 버린 것이다. 배탈이 난 돼지는 병원으로 찾아갔고, 염소 선생님 앞에서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굴렀다. 염소 선생님은 '에잉 쯧쯧 맛있다고 그렇게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돼지는 후회하며 약을 받아 온다는 이야기였다. 


 선생은 역할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염소 선생님 하고 싶은 사람?... 아이스크림 파는 OO 하고 싶은 사람?...... "  


그리고 돼지 역할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돼지 역할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돼지 역할하고 싶은 사람?... 돼지 역할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어??" 


 애당초 생각해보니 순수한 유치원생이 자기 잘못으로 배탈 난 돼지라는 한심한 역할을 자원할 리가 없었다. 선생의 목소리 톤은 높아지고 점점 짜증이 섞여가는 것 같았다. 선생의 묻는 소리 외에는 다들 정적이었다. 이 연극이 마지막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연극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여섯 정도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는 괜스레 그 아이들이 미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선생의 독촉은 계속됐다. 


"아무도 없어? 돼지 누가 할 거야?" 


"저... 제가 할게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였다. 그가 배탈 난 돼지 역할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이미 역할극을 끝냈으므로 참여할 의무가 없음에도 손을 든 것이다. 선생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래 너가 하라며 연극을 시작해버렸다. 그는 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손을 들었을까. 이런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역을 굳이 내가 나서서?' 


지금 생각해보면 이 상황을 타개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리라는 영웅심리와, 그가 어렸을 적 몸무게가 꽤 나가서 돼지라는 말을 종종 들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바보같이 손을 들었으므로 꼼짝없이 배탈 난 돼지 역할을 해야 했다. 돼지 그림이 붙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연극이 시작됐다. 대사는 '우와 아이스크림 너무 맛있다 냠냠 / 또 먹어야지 냠냠 / 어욱 배가 아파 우우욱 / 선생님 배가 너무 아파요 우욱 / 선생님 어서 빨리 치료해주세요' 따위였다. 연극이 시작됐다. 처음 몇 대사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염소 선생님한테 찾아간 이후부터 그는 대사를 하기가 싫었다. 당연히 대사가 제대로 안 나오고 그의 목소리도 기어들어갔다. 


선생은 이를 지적했다.

 "크게 제대로 말해야지!" 


 그는 눈 딱 감고 억지로 크게 대사를 하며 돼지 인형을 흔들었다..

"아이 선생니임 빨리 고쳐주세요오~"  


 그가 듣기에도, 대사를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심히 불편하고 거슬렸다.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오버할 때 나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유치원생이었으므로 표정 관리도 안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간신히 '배탈 난 돼지' 연극이 끝났다. 그는 왠지 모를 수치심과 짜증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친구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은 것 같다는 안도와 함께, 내가 너희를 위해 희생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며 괘씸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보는 유치원생은 없었다. 


 이후 다른 친구들의 연극이 몇 차례 있고 수업이 끝났다. 그는 이후 연극이 어떤 내용인지 들리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갈수록 그는 왠지 배가 아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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